> 자료실 > 성.유적지
◈ 성.유적지
제 목 회문리(회룡재) - 옥황상제님 강세지
작성자 작성일 2012-01-10
파 일

 

 

 


태극 1장 1절
옥황상제(玉皇上帝)님께서 도력(道曆)기원 전 14년(단기 4228, 서기 1895년) 세차 을미(歲次乙未) 음력 12월 초4일, 양력 이듬해 1월 19일, 경오(庚午)일진 계미(癸未)시에 당시의 조선국 경상도 칠원현 서면 
회문리(慶尙道 漆原縣 西面 會文里) 현재의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咸安郡 漆西面 會山里)에 강세하시니, 성은 조(趙), 본관은 함안(咸安), 어휘는 철제(哲濟), 어자는 정보(定普), 어호는 정산(鼎山)이시니라.


태극 1장 3절
회문리는 동방의 영산(靈山)인 백두, 금강, 태백, 지리의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다시 낙동정맥(洛東正脈)의 남단 부산(釜山)을 향하여 동으로 기복(起伏) 연면(連綿)한 낙남정맥(洛南正脈)의 중간에서 여항(艅航), 무학(舞鶴), 광려(匡廬)의 여러 명산을 이루고, 그 연맥인 자고산(紫皐山)의 주봉이 동으로 힘차게 뻗은 구릉 끝에 봉소형(鳳巢形)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니라. 그 주위를 우로는 천주(天柱), 작대(爵隊), 무릉(武陵), 좌로는 안국(安國), 대곤(大?) 등의 명산이 둥글게 에워싸고, 인근에 천계(天界), 안기(安基), 신산(新山), 무릉(武陵), 구성(龜城), 유원(柳原) 등의 마을이 있으며 회문리 앞들 중앙에는 곤내(?川: 일명 광려천)가 흐르고, 그 건너에는 구미산(龜尾山)이 회문리의 안산(案山)격인 대상형(臺床形)을 이루니라.


태극 1장 11절
이날 
회문리 일대에 3일간 계속 내리던 눈이 그치고 심한 안개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더니 강세하신 미시에는 일기가 청명하여지니라. 한편 산실 지붕으로부터 흰 무지개가 충천하여 7일간이나 걷히지 않았으며 다른 곳에는 눈이 쌓였으나 오직 산실 지붕에는 한 점의 눈도 없으니라.


태극 1장 37절
두 분께서 거금을 가지고 만주로 망명하신 소문을 들은 왜인 산본은 
회문리에 와서 남은 가족에게 행패를 부리고, 추수 후에는 담보로 잡았던 전 가산을 강제 압류하며 왜헌의 도움을 받아 더욱 횡포하므로 가족들은 혹심한 고초를 겪으시던 중 때마침 돌아오신 도장을 따라 만주로 떠나게 되시니라.


태극 2장 16절
신의주에서 1박하시고 다음날 철도편으로 한양에 임어하셔서 광화문 객사에서 여러 날을 행재하시며 경도(京都)의 풍물을 감상하시니라. 다시 철도편으로 밀양 파서리(巴西里)의 외가에 임어하셔서 9년만에 상봉하신 외가 친척들의 환대를 받으시고 며칠 동안 종남산(終南山) 일대의 지형, 지세를 관찰하시면서 공부처를 물색하시니라. 압록강에서 개안이 걷힌 이후 짜증이 가시지 않은 길룡을 창원(昌原) 중방(中房) 그의 외가에 데려다 주시고 
회문리(會文里) 고향에서 친척들과 오랜만의 정회(情懷)를 나누신 후, 구천상제님의 명에 의한 본소를 찾기 위하여 매씨를 거느리시고 다시 출어하시니라.


태극 3장 12절
5월에 상제님께서 서산공께 청탁하셔서 기유(己酉)년 망명 후에 남의 소유가 된 
회문리(會文里)의 옛집을 사들여 복구하게 하시고, 그 가족을 이주시켜 옛집과 선영(先塋)을 수호하며 농사로 생계하게 하시니 서산공께서는 황새마을과 회문리를 수시로 왕래하며 이를 감독하시니라.


태극 3장 49절
상제님께서 정초에 가족과 시종들을 황새마을로 돌려보내신 다음, 숭정부인과 상우만을 거느리시고 
회문리로 거둥하셔서 며칠 간을 행재하시니라. 이때 서산공의 맏사위인 칠원 구포(龜浦) 사람 배문걸(裵文傑)을 입도시키시고 시봉을 명하시니 문걸은 성정이 순후하고 학문이 뛰어난 선비였으며 이로부터 10여년간 상제님께 지성으로 시종하니라.


태극 3장 52절
유천 공부처에서 도수를 보시다가 구천상제님 화천일을 당하여 공부를 잠시 중단하시고 
회문리 옛집에서 치성을 올리시니라. 이에 앞서 미리 명을 받은 밀양의 이우형(李佑衡), 김용국(金容國), 최창근(崔昌根), 김병문(金炳文), 장득원(張得遠), 부산의 박민곤(朴玟坤), 안동의 권태로(權泰魯), 의성의 조원규(趙源奎), 예천의 이종창(李鍾昶), 신용흠(申容欽),봉화의 박붕래(朴朋來), 김천의 김옥규(金玉圭), 풍기의 조진명(趙鎭明) 등 임원들이 참례하니라.


태극 3장 68절
9월에는 홀로 행행하셔서 만주 노고산과 중국 강동지방 등 망명 당시 공부하시던 곳을 두루 순행하시며 도수를 보신 후에 대구로 환어하시니라. 다시 
회문리로 거둥하셔서 설을 쇠신 후에 칠서(漆西), 무릉(武陵)에서 공부하시고 2월에 태인으로 임어하셔서 도장공사를 독려하시니라.


태극 3장 91절
4월에 서산공에게 청탁하셔서 회문리 옛집을 중수하게 하신 다음, 그 옆 공지에 3칸퇴(間退) 규모의 아담한 정사(精舍)를 짓고 앞에 연못을 파게 하시며 “이는 후일을 예비하는 도수니라.” 하시고""
회룡재(廻龍齋)""로 명명하시니라. 다음해 선덕부인을 회문리 옛집에 거주하게 하시고 반상문(潘相文)으로 하여금 상주하며 시종하게 하시니라.


태극 3장 104절
임신(壬申)년 4월 25일에 숭덕부인께서 향년 58세로 화선하시니 상제님께서 비통함을 금하지 못하시니라. 양례(襄禮)를 도장(道葬)으로 정읍군 옹동면 용호리(龍虎里)에 안장하셨다가 병신(丙申)년에 
회문리 선영하에 도장산소와 합장하시니라.


태극 4장 6절
정축(丁丑)년 봄에 상제님께서 전주에서 공부를 계속하시니 김진생(金鎭生) 등이 시봉하니라. 가족을 모두 
회문리 옛집으로 이사하여 농사로 생활하게 하시니 정윤필(鄭潤弼) 등이 이사의 경비와 업무를 전담하니라.


태극 4장 8절
기묘(己卯)년 6월 초3일 선덕부인께서 
회문리 옛집에서 화선하시니 향년 59세시니라. 상제님께서는 평생을 창도사업에 헌신하신 부인의 공로를 회상하시고 비도(悲悼)하시며 몸소 초종상례(初終喪禮)를 주관하셨으나, 왜경의 횡포로 후하게 장례를 치를 수 없으셔서 인근 어령(於嶺)에 안장하시고 둘째 자제인 승래(升來)로 하여금 봉사(奉祀)하도록 지정하시니라.


태극 4장 9절
이해 가을에 상제님께서 회문리 옛집으로 이어하셔서 
회룡재(廻龍齋)에 설석하시고 두문불출하시며 공부하시니라. 시국은 왜의 폭정이 극도에 달하여 경제적 수탈과 정신적 압박이 극심하고, 심지어 민족 고유의 성명마저 개역(改易)하도록 강요하였으나 상제님께서 이를 끝까지 거부하시니 왜는 재산 소유권 등 자유와 인권을 박탈할 뿐만 아니라, 배급제로 한 식량, 비료 등 생활 필수품에 이르기까지 관권(官權)을 악용한 강압을 가하니라.


태극 4장 11절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괴로움 속에서도 
회룡재에서 주공부(籌工夫) 등의 공부에만 전념하시더니 가을 어느 날 잠시 과거를 회상하시며 비록 도수에 따른 잠룡기라 할지라도 벌써 4개성상(四個星霜)이 지나도록 대업을 수행하지 못하시는 상념에 잠기시니라. 이때 구천상제님께서 계시하시기를 “모든 것이 천기니 지각(智覺)으로 도난(道難)을 감내하고 오직 대도성취(大道成就)의 회룡운(廻龍運)을 기다리라.” 하시니라.


태극 4장 12절
도기 32년(단기 4274년, 서기 1941년) 경진(庚辰)년 가을에 상제님께서 이용직(李龍稙)에게 친서를 쓰셔서 장남 준래(俊來)로 하여금 우송하게 하시니라. 용직은 예천(醴泉)사람으로 조실부모하고 가세가 빈한한데다 왼다리를 절며 고용살이로 전전하다가 도문에 들어온 후 지성으로 신봉하더니, 무극도의 해산이 원통하였으나 상제님의 하명을 명심불망(銘心不忘)하고 고향에서 머슴살이하며 때를 기다리니라. 이때 어서(御書)를 받들고 반가운 나머지 목놓아 울며 내용을 살피니 “네가 지우금(至于今) 나의 말을 명심하고 기다림이 가상하니 이 서신을 보는 대로 
회문리로 찾아오라.” 하셨으므로 회문리를 향하여 망배를 올린 다음, 당일 출발하니라.


태극 4장 13절
이용직은 상제님께서 제 마음을 헤아리시고 주소까지 아셔서 어서(御書)를 내리신 일이 신이하고 황송, 감격하여 불편한 몸으로 며칠을 걸어 회문리에 당도하니라. 목욕재계, 의관을 정제한 다음, 
회룡재에 올라가 상제님께 배알하며 기쁨의 눈물을 그치지 못하니 상제님께서 반가이 맞아 위로하시며 “네가 나의 명을 잊지 않고 기다리기에 서찰을 보냈었노라. 그러나 너는 머슴살이에 매인 몸이니 내려가서 마치고 올라오되, 아직은 나의 거처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시니라. 용직은 며칠 후에 다시 돌아갔다가 10월에 3년간의 고용기한을 마치고 새경으로 받은 백미 석섬을 매각하여 한 푼도 쓰지 않고 회룡재에 와서 성금으로 올리니, 고사(固辭)하시다가 용직의 지극한 정성을 물리치지 못하시고 드디어 거두셨으며 용직은 이로부터 회룡재에 상주하며 상제님을 시종하니라.


태극 4장 15절
상제님께서는 혹독한 추위에도 
회룡재 공부실에 불을 때지 못하게 하시므로 용직이 살피니 상제님께서 법좌하신 채 법수 두 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드시고 철야 공부하시니라. 법수가 넘쳐 어수(御手)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고 어지(御指)는 동상으로 터져 배접을 하셨으나 그 겉에 피가 맺히셨으며 손발에는 얼음이 박혀 부으셨어도 괴로워하시거나 동요하지 않으시니라. 너무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참을 수 없어 영을 어기고 몰래 불을 때기 시작하니 “네가 내 몸을 걱정함은 가상하나 내가 이렇게 하여야 천하사가 성취되리니 너는 나의 공사를 방해하지 말라.” 하시며 엄히 책망하시므로 끝내 불을 때어 드리지 못하니라.


태극 4장 18절
상제님께서 이때까지 도를 잊지 않고 때를 기다리던 문경의 박내익(朴來益), 영주의 김명구(金命求), 김천의 김태만(金台萬) 등도 친서 또는 인편으로 소환하셔서 용직과 함께 포덕하도록 하명하시니 이로부터 도운이 다시 맹동(萌動)하니라. 그들이 지방에서 매월 
회룡재에 내왕할 때는 왜경을 피하여 야간에 산길을 이용하니라.


태극 4장 20절
12월 중순에 상제님께서 "상설도수(霜雪度數) "라 하시며 
회룡재 뒤뜰에 짚을 펴시고 공부설석하셔서 15일간을 철야하시니라. 이때 매일 밤 서리와 눈이 내려 의관을 덮었으며, 파석(罷席) 전날 밤에는 백설이 더욱 많이 내려 옥체보다 높이 쌓였으나 미동도 아니하시니라.


태극 4장 21절
임오(壬午)년 봄 어느 날 
회룡재에 매월 올라오는 용직 등 도인들에게 하명하시기를 “그대들이 도를 믿는 것은 역시 나를 믿는 까닭이 아니냐? 그러므로 나도 이제는 머지 않아 새 옷으로 갈아입으리니 그대들도 포덕에 더욱 힘쓸 것이며, 이 도장을 앞으로는"?회문도장(會文道場)"?이라 부르도록 하라.” 하시니라. 하명을 전해 받든 도인들은 하명의 깊은 뜻은 깨닫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사기 충천하여 포덕에 더욱 진력하니라.


태극 4장 28절
을유(乙酉)년 원조에 상제님께서 
회룡재에서 명절치성을 올리신 후, 각 지방에서 올라온 도인 중에서 이용직, 김명구, 박내익, 김태만 등을 지방임원으로 임명하시니라. 임원들에게 하교하시기를 “내가 봉천명한 지는 올해로써 만 36년이며 잠룡한 지는 10년째가 되었도다. 그 잠룡도수 9년간에 그대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말도 마음놓고 하지 못하며, 냄새조차 풍기지 못하는 고통을 참고 견디어 왔음을 치하하느니, 이 실로"?잠룡, 지각도수(知覺度數)"?였느니라. 이제야 큰 도수는 고비를 넘겼으므로 새해에는 나도 정말 새 옷으로 바꾸어 입으리니 태아도 10삭이면 출생하고, 잠(潛)도 회(廻)하면 현(見)하고 비(飛)하는 법이라, 나의 도는 이제 이름만 지으면 되느니라. 그대들은 안심하고 포덕에 힘쓰되 전 도인에게"?새 도수기운(度數機運)이 가까워 오니 참고 기다리라"?라고 전하라.” 하시니라.


태극 4장 30절
2월 하순에 지방임원들이 올라와서 상제님께 배알하니 하교하시기를 “내가 지난 3년간 태극의 기동(機動)과 해박(解縛), 현룡(見龍)의 대도수로 3?8동방목운(三八東方木運)을 회선(廻旋)시켜 천하창생을 구제할 도운과 국운의"?회룡도수"?를 성취하고자 계속하여온 공부의 마지막 백일공부에 들어가노라. 이는 
회룡재 공부의 종결이며 대도회룡(大道廻龍)의 일대전기(一大轉機)니 그대들도 도장에 올라오나 지방에 내려가나 더욱 근신하고 각자의 본분을 다하라.” 하시고 공부에 들어가셔서 6월 초순까지 두문불출, 독수고행(獨修苦行)하시니라.


태극 4장 38절
7월 초3일 밤에 임원들이 평일과 같이 
회룡재로 올라가 혼정문후(昏定問候)를 올리니 상제님께서 준엄하신 가운데 자애롭게 말씀하시기를 “내 오늘은 그대들에게 태극의 진리를 도상(圖像)으로 설명하려 하노라. 태극은 오도(吾道)의 연원이며 또 우주 전체의 생성, 발전하는 대원리니라.” 하시니라.


태극 4장 41절
이튿날 진(辰)시경에 상제님께서 후원 죽림에서 가장 큰 대나무를 베어 21척으로 자른 깃대에 친히 그리신 태극의 기폭을 달게 하시니라. 그 태극기를 숭도부인으로 하여금 
회룡재 뒤뜰에 세워 혼자 붙들게 하시고 기를 향하여 법좌하셔서 태을주를 연송하시며 공부하시므로 일동도 따르니라. 이때 동방에서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이 요사(妖邪)하여 부인 혼자의 힘으로는 깃대를 가눌 수 없어 쓰러지려 하시니라. 임원들이 부인을 부축하려 하니 상제님께서 금하시며 “이는 동방의 한 사기(邪氣)가 하는 방해이나 음양합덕(陰陽合德)의 태극원리(太極原理), 정음정양(正陰正陽)의 기동이 도수에 이르렀으니 어려워도 혼자서 하여야 하고 남의 힘을 빌리지 않도록 함이 옳으니라.” 하시므로 부인께서는 힘에 겨우셔서 온 몸이 땀에 젖으시니라. 잠시 후에 상제님께서 동방으로 손을 올리시니 바람이 멎었으며 오(午)시경까지 공부하시니라.


태극 4장 44절
5일째 되는 초8일, 양력 8월 15일의 새벽에 상제님께서 새 옷을 갈아입으시더니, 처음 보는 동자가 
회룡재 문전에 부복하고 상제님께 상고하기를 “왜왕(倭王)이 간밤에 무조건 항복하였나이다.” 하였으나 상제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동자는 인홀불견(因忽不見)하니라. 임원들이 이상히 생각하여 상제님께 여쭈니 “그는 신동(神童)이니라.” 하시고 더 말씀이 없으셨으며 아침에는 태극기를 옮겨 회룡재 앞에 세우게 하시고 공부를 계속하시니라.


태극 4장 45절
이날 미(未)시경에 
회문리 이장 황천수(黃千壽)가 와서 상제님께 고하기를 “오늘 정오에 왜왕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고 조선은 광복이 된다 하나이다.” 하매 “이것이 바로"?해방도수"?니라. 그러나 태극의 기동이 합덕(合德), 조화(調化)하여야 하거늘…….” 하시며 “너희는 모두 경거망동을 삼가하라.” 하시니라.


태극 5장 50절
이해 9월 22일에 복우도장께서 향년 74세로 도장내당에서 화선하시니 상제님께서는 더없이 애통하시고 양례를 도장(道葬)으로 모시니라. 초종범절(初終凡節)을 승중제도(承重制度)와 같이 장자 청봉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시니 도중이 엄숙, 경건하게 받들었으며, 장지는 부산 아미동(峨嵋洞)과 감천동 사이의 반월령(半月嶺) 서북편에 정하여 장례를 모셨다가 병신(丙申)년에 
회문리 선영하로 면례(緬禮)하시니라.


태극 4장 64절
이해 6월 한더위가 심한 어느 날 이용직, 김명구 등 임원들이 
회룡재에서 시좌하였을 때,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오늘은 풍운조화를 보여 주리라. "하시자 청천 백일에 홀연히 광풍이 일어나고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 암흑천지를 이루면서 소나기가 쏟아지니라. 상제님께서 도장 안채 지붕을 가리키시며 “저기를 보라.” 하시므로 임원들이 바라보니 세차게 쏟아지던 소나기가 그치고 때아닌 흰눈으로 변하여 눈보라가 휘날리는데 다른 곳에는 눈이 쌓였으나 그 지붕에는 쌓이지 않아 모두 신이하게 생각하니라. 다시 "그만 그치리라. "하시니 날씨가 청명하여지니라.


태극 4장 84절
이 무렵 각 지방 임원과 도인들은 순석의 집으로 와서 봉교하게 하시더니, 하루는 임원들에게 옛시를 외워 주시며 "잘 기억하여 두라, 후일 알 일이 있으리라. "하시니 이러 하였으며, 10월 말경에 상제님께서 다시 회문도장으로 환어하셔서 
회룡재에서 공부를 계속하시며 임원들만 내왕하게 하시니라.
耳目聰明男子身 洪鈞賦與不爲貧
이목총명남자신 홍균부여불위빈
須探月窟方知物 未攝天根豈識人
수탐월굴방지물 미섭천근기식인
乾遇巽時看月窟 地逢雷處見天根
건우손시간월굴 지봉뇌처견천근
天根月窟閑來往 三十六宮都是春
천근월굴한래왕 삼십육궁도시춘


태극 5장 40절
동란 중 전장에서의 살상과 파괴도 심하였거니와 비전투지역에서도 북한 패잔병들이 저지른 살인, 방화 등 만행과 이를 섬멸하려는 국군의 작전으로 생겨난 피해도 많으니라. 이해 7월에 북한군이 함안(咸安)까지 점령하였을 때, 회문도장에 있던 도중가족 일부와 박덕구 등은 극심한 박해를 당하였으며, 수복 후에는"?패잔병의 은신처가 될 우려가 있다."?는 구실로 국군이 인근 마을의 가옥과 산림을 불태울 때 
회룡재도 도장과 함께 소실되니라.


태극 5장 44절
상제님께서 
회룡재가 소실된 소식을 들으시고 하교하시기를 “인간이 무도하면 금수와 다를 바 없으며 그 극단(極端)이 전쟁이고 살인이어늘 동족상잔의 비겁 속에 어찌 방화만을 탓하랴? 회룡재가 소실됨은 가석한 일이나 이로써 전화(戰禍)가 감소된다면 오히려 불행중 다행이니라. 또 잠룡이 장차 현룡, 비룡하기 위한 회룡에 화둔(火遁)을 묻는 도수였느니 무가내(無可奈)니라. 그러나 동란(動亂)이 있으면 정란(靜亂)도 있을지니 만일에 동이 있고 정이 없으면 천지내에는 도가 없는 법이라, 소진(燒盡)이 있으면 복건(復建)도 있으며, 결원(結?)이 있으면 해원(解?)도 있는 법이니라. 도인들은 세상이 아무리 소란하고 무도하여도 도를 믿고 도를 닦으며 도를 펴는 데만 전념하면 나머지 일은 도수에 따라 이루어지리니 진도(眞道)는 부동(不動)이요, 도심(道心)은 불란(不亂)이니라.” 하시니라.


태극 7장 87절
이달 29일에 상제님께서 보수동 부산도장을 보수도정(寶水道庭)으로 개칭하시고 감천동 구덕정사의 정침(正寢)은 
회룡재(廻龍齋), 공부실은 산회당(山會堂), 그 경내를 부산도장으로 명명하시며 “이곳에 장차 대학도수, 청학공부(靑學工夫)를 열 것이며 계대(繼臺), 영대(靈臺)가 있게 되리라.” 하시니라.


태극 8장 73절
상제님께서는 본래부터 “내 앞에는 서자(書字)가 필요하지 않으니라.” 하시며 일체의 문서는 소화하셔서 남기지 않으시고 진영도 기념 촬영조차 엄금하시니라. 9월 13일 아침에 청구가 사진기를 가지고 정사에 올라가 상고도 없이 
회룡재 정침에서 독서하시는 상제님 진영을 촬영하니, 이는 청구 자신이 무의식 중에 한 일로서 촬영 후에야 무엄하게 저지른 일임을 깨닫고 당황하였으나, 상제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법단으로 거둥하시니라.


태극 9장 49절
이날 밤 초경에 
회룡재에서 학정 김영하와 도정영대(道庭靈臺) 시봉 이창로가 소관 업무 관계로 시좌하였을 때 숭도부인께서 상제님께 “한경의 위인이 나약하여 도중사 전반을 책임하는 도전으로는 미흡하지 않나이까?” 하고 사뢰니 말씀하시기를 “나도 그러함은 아오. 그러나 협의회가 있으니 부인은 과념(過念)하지 마시오. 상제님 앞에도 경석(京石)이 있지 않았소?” 하시고 또??사람을 쓰는데 소인인 줄 모르고 쓰면 실패하지만 소인인 줄 알고 쓰면 쓰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소.??하시니라.


태극 9장 63절
2월 28일 밤 자정에??상제님께서 갑자기 미령(靡寧)하시다??는 전갈을 정급 신경희(申景熙)로부터 들은 상급임원들이 황망히 법단에 올라가 뵈니, 어환(御患)이 위중하시므로 옥체를 
회룡재(廻龍齋) 정침으로 모시고 철야 시탕(侍湯)하였으나 차효가 없으시니라. 날이 밝기를 기다려 도중가족들에게 전편(專便) 또는 서신으로 알리고 최근욱(崔根郁), 김재복(金載福) 등 의사를 불러 양방, 한방의 약물, 주사, 침구 등 지극한 정성으로 치료하였으나 어환은 여전하시니라.

이전글
다음글 황새마을 공부처(후천 해원도수의 공사인 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