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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도학원론 제3장 구천.옥황 양위상제님(제3절 옥황상제)
작성자 작성일 2012-01-02
파 일

1.옥황상제의 위격

위에서 구천상제의 위격을 말했지만 양위상제께서 도로써 일체〔以道一?〕가 되시는 도의(道義)와 함께 그 위격의 신성(神性)적 신격위와 또 인성(人性)적 인격위를 파악 회득(會得)해야 하는 것은 중요하다.

중요하다기보다 절대 불가결의 도의인 것이니 진리[道]의 주신이신 양위상제를 명확히 알지 못하면 그것은 마치 가구주(家口主)의 이름도 모르고 남의 집을 찾아가는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되기 때문이다.

먼저 신격위(神格位)로서는 태극주(太極主) 옥황상제(玉皇上帝)이시니 약칭으로 옥황상제 또는 태극도주라고만 불러도 되는 것이다.

태극주란 문자 그대로 태극의 주신(主神)이라는 뜻이니 태극도주란 뜻과 같고, 생존시에는 주인(主人)이시며 환어 후에는 당연히 주신이 되신다.

간단히 해석하면 태극주=태극의 주신. 옥황상제=옥경〔천중천(天中天)〕의 황제(최고신의 호칭)이신 상제라는 뜻이다.

인신으로 세상에 현화하신 인격위(人格位)는 무극신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 태극도주 조성정산상제(无極神 大道德 奉天命 奉神敎 太極道主 趙聖鼎山上帝)이시다.

무극신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이 호칭은 호칭이라기보다 구천상제로부터의 도통전승을 사실(史實)대로 기록한 관형사(冠形詞)인 것이니 그 뜻은 무극주이신 구천상제의 그 크신 도덕의 천명을 받들고 신교(新敎)를 받들어 모셨다는 뜻이다.

태극도주=원래는 태극의 주신이시면서 태극도의 도주가 되신다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2중적(二重的)해석이 되나 여기서는 후자에 해당된다.

조성(趙聖)=조씨 성의 대성인. 정산(鼎山)=봉천명 때 구천상제께서 하명하신 도호(道號).

약칭으로 조성상제, 정산상제, 상제 또는 도주라고 하는데 신격위인 옥황상제의 호칭으로 봉칭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끝으로 한 말을 더 붙이면 옥황상제이신 조성정산상제께서는 재세시로서 기준하면 성인 중 대성인이신 동시에 근엄하신 선비시었고 또 사업적으로는 대실업인의 포부와 경륜이 있으셨다.

그러나 그의 신격위는 옥황상제로서 신명계에서 최고위에 계셔서 구천상제와는 도로써 일체이신 도의 신앙대상이시므로 구천상제와 아울러 양위(兩位)상제가 되신다.

2. 도주 정산의 행장

위에서 도조이신 증산 곧 신격위로서 무극주 구천상제를 말하면서 정산 도주 곧 태극주 옥황상제를 겸해서 말하였으므로 중복을 피해가면서 논술하려 한다.

한 가문에 가조 족조와 호주(戶主) 가장이 있고 국가에 국조와 원수(元首)가 있듯이 종교에도 도조, 도주가 있는 일은 상식에 속한다.

예를 들면 불교의 경우 석가모니를 불조(佛祖) 또는 교조(敎祖)로 부르고 또 사바교주(娑婆敎主)라고 한다. 미래에는 당래교주(當來敎主) 미륵이 있어서 구별된다.

국내 종교로는 천도교의 경우 교조는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며 교주는 1세 수운, 2세 해월(海月), 3세 의암(義庵)인데 그 이후는 교령(敎領)이라 부르고 있다.

태극도는 과거 무극도 시대부터 증산도조에 정산도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시적(可視的) 도단의 조직 체계일 뿐 진리로서의 도에는 신격위로서의 양위 상제로 봉대(奉戴)하고 있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옥황상제이신 도주 정산의 행장에서도 먼저 인적사항부터 살펴본다.

1)인적사항(人的事項)

강세지:경상도 칠원현 서면 회문리

(慶尙道 漆原縣 西面 會文里)

현(慶南 咸安郡 漆西面 會山里)

본관:함안 조씨(咸安趙氏)

양친 부:조용모(趙鏞模), 자 순필(舜弼), 도호 복우도장(復宇道丈)

모:여흥민씨(驪興閔氏), 도호 숭덕부인(崇德夫人)

명호:휘 철제(哲濟), 자 정보(定普), 호 정산

강세일:도기 전 14년 을미(乙未=서기 1895년) 음 12월 초 4일(양1896년 1월 19일)

가계:28대조 대장군 원윤 鼎…19대조 공조전서 열(悅)(함안으로 낙향)…17대조 정절공 여(旅)(생육신의 한분)…13대조 호조참판 방(?)…11대조 함익(咸益)…고조 화식(華植)…증조 性義 조부 승정원 주서 영규(瑩奎)

2)강세 전후

정산상제의 강세 전후에도 범인들과는 다른 신이한 일들이 있었으니 진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복우도장(정산의 부친)과…부인의…꿈에…천상 옥경에서…일위 선관이…내려와서…경배하며…”…진멸지경의 3계를 광구하기 위하여…인신으로 강세하고자 하오니…받아주옵소서”하며 부인의 품에 안기니…이 때 방 안에는 향기가 만당하고 밖에는 서광이 충천하니라.(태1:8)

취당공(정산의 조부)은…같은 시각에 꿈을 꾸시니…하늘이 갈라지며…태양이 자부의 품에 안기니라.(태1:9)

12삭만의 출산에…숭덕부인(정산의 모친)의 산통이 극심…비몽사몽간에…약탕기를 든…선녀가…내려와서…”탄생하시는 옥동자는…진주이심을 전하옵고…”하며 약탕기를 입에 드리우니라.(태1:10)

산실 지붕으로부터 백홍이 충천하여 7일간…다른 곳에는 눈이 쌓였으나 오직 그 지붕에는 일점설도 없느니라.(태1:11)

강세초부터 기골이 장건…기상이 준수…전신에서 후광을 발하시고…천중천정이 광대…일각 월각이 풍륭…봉안에 안광이 찬연…융준 용안 학경 구배시니라.(태1:12)

위의 증산상제의 경우에도 말한 바와 같이 우주 3계의 상제로 받들어 모실 정도의 대성인이 지상에 화현하시는데 이러한 기사(奇事)들 쯤은 따져보면 그렇게 놀랄 정도는 아닌 일이라는 것을 다시 말할 수 있다.

구천상제 상세시의 태몽 등과는 또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는 바 특히 구천상제 때의 불덩이와는 몇 가지 다른 유형의 징조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양친의 몽사에 옥황상제께서 몸소 나타나시는 것이 그것인데 ‘3계를 광구하기 위하여 강세 한다’는 것을 직접 선언하신 것이다.

이 사실은 상제 강세의 목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직설(直說)하신 것에서 무극주와 태극주로서의 성격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한 대를 더 올라간 조부 취당공의 몽사에는 찬란한 태양이 솟아나므로 상징되는데 이것도 구천상제 태몽의 불덩이에 대한 구체적인 용(用)의 성격이 나타난다 할 것이다.

3) 유소(幼少)시기

유소시부터 그의 모습에도 많은 특징이 있으니 기골 장건/기상준수/전신에서 후광/천중 천정 광대/일각 월각 풍륭/봉안의 안광/융준 용안/학경 구배/등에 칠성문/우고(右股) 3적자/좌고 72적자/발바닥 3적자/턱에 용수/수족에 용조(龍爪)/음성 용성(龍聲) 등 범상한 인간이 아닌 신성(神性)의 소유자다운 면모를 갖추심은 전항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다.

강세 후 6개월에 걸음과 말을 익히시고 첫돌에…보고 듣는 일을 잊지 않고…사리를 채문…(태1:14)

옳다고 생각하신 일은…반드시 실행…호생지덕으로 곤충 한 마리 풀 한포기라도 함부로 훼상함이 없으시니라.(태1:15)

대인의 풍도로 심성이 활달 명석…어떤 일에도 침착 조밀하시니라.(태1:16)

이 해(7세)에 홀로 육갑과 월력의 구성법을 고안하시고…(태1:18)

위에 소개한 구절들로서 그야 말로 천종지성(天縱之聖)으로 유소시부터 세인에게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신동이라는 일컬음을 들으시었다.

거기에 다른 가문과 달라서 함칠(咸安 漆西)지방의 3대 명문가(名門家=흔히들 조리안(趙·李·安)이라고 한다)의 첫째인 함안 조씨에 조부 취당공과 복우도장을 위시한 선대 형제분의 애국운동의 영향을 어릴 때부터 받아오신 것이다.

복우도장께서 안빈낙도와 검소존절을 강조하시고 의방(義方)과 요결(要訣)을 취함이 군자의 길이라고 훈도하심을 정산께서는 처세의 좌우명으로 하셨다.

7세 때부터 서숙에 다니는데 엄동에 장거리 도보로 동상에 걸리기도 여러 번 하셨지만 10세 전후에 4서 5경 제자백가서를 모두 섭렵하실 만큼 총명 영특하셨다.

계묘년(1903년) 12월 잠시 오수(午睡)에 한 선관이 나타나서 ‘진인을 알현한다’고 4배를 한 일도 기사(奇事)의 하나다.

상제의 소년기에 조부 취당공은 한일보호조약의 체결로 관직을 사퇴한 후 그 억정으로 토혈까지 한 후에 순국하는 일을 당하셨는데 이 취당공의 유훈을 받은 정산도주의 일생에도 애국 위민의 충정이 없는 때가 없으셨다.

또 부친 복우도장 3형제분은 칠원 도덕골에서 항일운동에 쓸 화약을 제조하다가 왜헌(倭憲)에게 밀고되어 가운(家運)에 대변혁을 맞는다.

하기는 화약 제조시에 그 자금으로 가산을 저당하여 거금(당시로서는 상답(上畓) 수 10만평 상당)을 차용한 것인데 그래도 그때 돈 수천원이 수중에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4) 망명(亡命)과 봉천명(奉天命)

이러한 암흑기를 당하여 14세의 도주께서는 어른들에게 간도(間島=만주 남부)지방으로의 망명을 진언하셨다.

여기에 특기할 일은 원체 신기한 태몽으로 얻은 자제이기 때문에 부친 복우도장께서는 정산의 말이라면 유소시부터 믿고 따랐으며 후에는 도에 귀의하여 도주께 존경심으로 대한 것이 마치 불교의 교주 서가모니에게 귀의한 정반왕의 경우와 쌍벽이 된다 할 것이다.

도기 원년 기유(己酉=1909년) 4월28일, 이날은 전 가족 망명의 날이지만 그보다도 인간 정산이 천명을 받든 대각(大覺)으로서 자신이 태극의 진주(眞主)임을 대오(大悟)하시게 되는 종교사적인 날인 것이다.

이 일대(一大) 사실을 진경에서 알아본다.

4월 28일에…대전역 근처의 철도주변에 행행하셔서…”이제 나의 일은 다 이루었도다., 남아 15세면 호패를 차느니 무슨 일을 못 하리요. 과연 인유기인(人有其人) 시유기시(時有其時)로다”하시고…(무9:153)

미시(未時)경 대전 부근에 임하셔…홀연히 일광같은 안용에 황금색 용포의 신인 한 분이 현현하셔서 우레 같은 음성으로 “내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노라. 그대는 3계의 진주니…나의 도통을 이어…무극대운의 대공사를 성취하되 내 명교를 받들어 태극의 진법을 용하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광구 삼계하리라.”(태1:39)

“그대의 호는 정산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간이며 이도일체(以道一?)니라.…나는 구천의 천존상제 로라.”…(정산)상제께서는… 이 신인이 바로 진리의 당체이신 구천상제이심을 깨닫는 동시 봉천명의 도열(道悅)속에 몸소 태극진주임을 대오자각하시고…심서(心誓)하시니라.(태1:39)

이 봉천명(奉天命)의 사실은 무극과 태극 곧 증정지도(甑鼎之道)가 양위상제를 두 기둥으로 해서 확립되는 순간이기에 태극도는 이날을 봉천절(奉天節)로 기념하고, 이 해를 도력 기원(道曆 紀元)의 원년으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극·태극에서 양의(兩儀) 양위(兩位)가 정립되는 지상의 현실계의 새 기원이 되는 원년 원월 원일인 것이다.

도통의 전수(傳授) 전수(傳授)의 성격이 아닌 전지승지(傳之承之)로 표출되는 순간이었다.

이 봉천명의 사실은 망명지인 요령성의 성도(省都) 심양(瀋陽)의 도명(都名)이 이 무렵 봉천(奉天)으로 개명(改名)되었다가 그 후에 다시 심양으로 고쳐진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 3계운도(三界運度)의 계합(契合)이라는 것이다.

5) 득도(得道)와 봉삼천(奉三天)

상제의 화인(化人)으로 오신 몸이지만 정산상제께서는 인신이신 자연인 그대로 봉천명이래 평생 도수 공부에 열중하셨으니 그 햇수가 50년이다.

망명지인 만주에서도 요령성(遼寧省) 수둔구(水屯溝 :현재는 글자의 뜻대로 수풍댐에 수몰(水沒)되었다 함)에 있는 노고산(老姑山)에서 공부를 계속하셨다.

그리고 두 번에 걸쳐 중국 본토를 주유(周遊)하시며 공부하시니 이것이 바로 황극신도수(皇極神度數 무8:169참조)와 대중화보은도수(大中華報恩度數 무8:212참조)에 따른 도수 공부였다.

이 중국 본터 공부에는 인세의 부친이신 복우도장의 애국운동을 중국보황당(保皇黨)의 일원으로 오인한 원세개(袁世凱) 정부에서 구속 신문하는 일이 있었던 바 정산상제께서 진정서를 제출하여 무사 석방하게 하신 인자(人子)로서의 지극한 효성의 배경적 연관이 되는 것도 하나의 신인조화(神人調化)적 도수였다.(태1:41~55참조)

중국서의 공부 중에 자신이 그 해원을 자처하신 초패왕(태7:90참조)의 고향 회계(會稽)에서 정사(丁巳)년 원조(元朝)를 맞아 구천상제의 계시를 받드시니 이것이 도통 전승과 함께 득도(得道)의 요긴한 도수다.

그 명교의 내용을 진경에 의해 살펴본다.

“이제 나의 도수에 따른 그대의 대중화보은공사가 끝났으니 본가로 돌아가서 다시 나의 명교에 따라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도통의 연맥과 인계의 인연을 다지도록 하라. 이 곧 득도니라.”(태2:1)

“또 이 글은 구세제민할 주(呪)니 잘 기억하라.”(태2:2)

※ 기도주=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至氣今至 願爲大降

태을주= 훔치 훔치 太乙天上元君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娑바하

이 후에 윤 2월 초 6일에 다시 계시를 받드시고 초 10일에 득도치성을 올리신다.

이로써 성업(聖業)의 도통(道通)과 함께 의궤(儀軌)의 득도를 병행함으로써 해서 음양합덕, 신인조화의 태극진리를 몸소 봉행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천의 현현 계시가 다음과 같이 있었다.

이튿날 축시 기도시에…“그대가 이제 득도 하므로 써 인계에서의 나의 도통을 다졌으니 흔감 하도다.”(태2:5)

이 후에 역시 구천의 계시로 대중화도수공부 9년 만에 환국하셔서 서울, 밀양, 창원 등을 거쳐 칠원 고택(古宅)에 들르신 다음 구천상제의 계시에 따라 본소(本所)를 찾아 나서신다.

그 사이에 안면도(安眠島)와 황새마을 등지에서 포덕으로 많은 도인을 얻은 위에 갖은 신고 끝에 본소를 찾으시게 되니 이 또한 구천상제께서 일찍 매씨인 선돌부인(후일 도중에서 선덕부인(宣德夫人)으로 추존(追尊)하여 봉사(奉祀)하고 있다)을 시켜 비전(秘傳)하신 본소였다.

그리고 부인께 직접 ‘후천진인 을미생을 즐겁게 맞으라’(무9:15, 태2:41~44참조)하시는 명을 내린 결과였다.

여기서 10년 전 구천상제께서 벽 속에 비장하신 천서(天書=현무경과 주문서)를 찾아 받들고 그 오의(奧義)를 체인(體認)하신다.

그 후 다시 둔궤(遁櫃)를 찾아 얻으시니 이것이 곧 천보(天寶)다.

이 둔궤는 구천상제께서 재세시에 도수(무8:19~22참조)를 보시고 손수 자물쇠로 잠그신 것이며 정산상제께서 이 둔궤를 반구정(伴鷗亭)에 모시고 백일간의 둔궤도수 공부를 마치신 후 열쇠를 만들어 열어도 열리지 않던 자물쇠가 주(籌)대를 넣는 순간 뇌성벽력과 함께 스스로 열린 기적이 일어나니 이날이 경신(庚申=1920)년 양력 4월 초 5일이었다.(태2:81~85 참조)

1 봉천명, 2 봉천서, 3 봉천보의 이 3천이야 말로 구천상제의 도통(道通)의 표징인 것으로써 과연 구천·옥황 양위상제가 진리의 혈맥으로 이어지는 도맥(道脈) 도통(道統)의 완전 전승(傳承)이며 양위께서 완전 일체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천명은 심령(心靈)으로, 천서는 지(智)와 혜(慧)로, 천보는 물상(物象)으로 천·인·지(天人地) 3계, 3극으로 이도일체(以道一?)의 비의(秘義)를 드러내신다.

이로써 무극주 구천상제의 태극주 옥황상제께서 도로써 마음으로써 또 현실로써 물적 표상으로써 그 도맥, 도통, 법통의 전승을 명백히 표상하고 있으니 양위상제는 원래 진리로써 한 몸이시기 때문이다.

6) 무극도 시기

도기 13(1921)년 신유(辛酉) 4월 28일 도명(道名)을 무극도(无極道)로 해서 구천상제께서 도조(道組)이심과 친히 도주(道主)이심을 선포하시고 신자를 도인(道人)으로 호칭하기로 하시니 이것이 곧 도단(道團)의 창립(創立)이다.

도의 개창을 선명(宣明)하게 하신 후 3년이 되어 도인의 수가 십 수만이 되었으므로 항구(恒久)한 도장이 있어야 되게 되었다.

도인들이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도장영건에 임하였다.

정읍(井邑)군 태인(泰仁) 태흥리(泰興里) 도창현(道昌峴)에 개설한 이 당시의 본부 도장은 5천여 평의 부지에 영대(靈臺), 도솔궁, 그밖의 부속건물과 함께 19동 240간 이었다.

오늘에 이 도장이 남아있었다고 하면 그 후면에 나타난 치마바위의 신묘함과 함께 건축문화재로서도 가치가 있는 웅대 절묘한 건축물이었다.

그 후 대도의 신조·강령·요체를 설정하시며, 조직 체계를 정비, 임원을 임명하셨다.

또한 취지서·도규·각도문·포유문 등을 반포하시고 치성과 기도·수도의 절차 등을 제정하셨다.

새로운 기운(機運)에 즈음하여 도인들도 성·경·신으로 포덕과 수도에 힘을 쓰니 도인의 수가 10만을 넘었다.

그런데 이 무극도의 종교 단체로서의 개창은 그 사적(史的)의의가 크지마는 또 증산계 전 교단 내지는 민족 종교 전체에 커다란 명제를 던지고 있다.

그것은 현재까지도 통일되지 않은 무극주 증산 상제의 위격(位格)을 신도(神道)와 인도(人道)로 정확하게 봉대(奉戴)하신 사실이다.

지금도 그저 인간의 훌륭한 성인으로 아는 대성(大聖)이란 호칭을 쓰는 이도 있고 또 일반적인 선생이라고 하기도 하고 강성상제(姜聖上帝) 무성상제(戊聖上帝) 증산상제(甑山上帝) 미륵존불(彌勒尊佛) 옥황상제(玉皇上帝)등 자기 생각대로 봉대(奉戴)하고 있는 등 호칭에서부터 혼란이 막심하다.

옥황상제 도주께서는 봉천명 때부터 또 많은 계시를 통해서 신격위로는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 인격위로는 ‘강성증산상제(姜聖甑山上帝)’로 봉대하여 영위를 봉안하셨으니 진정 증정지간(甑鼎之間)의 이도일체(以道一?)적 존재가 아니시고는 인위적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도중 사업이 일취월장한 가운데도 특기할 일은 진업단(進業團)을 조직하여 개간, 수리, 간척사업 등을 일으켜 도단과 도가의 경제기반을 확고하게 하신 일이다.

또 그 단원들을 1개단 200명은 북만주로, 300명 1개단은 함경도 무산으로 파견하여 산림벌채 등에 종사케 하셨다. 뿐만 아니라, 안면도와 원산도에 간석지를 개척하여 많은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충북 음성의 무극광산(無極鑛山) 등 72개 광구를 출원 등록한 후 몇 개 광산에서 금, 은 등 많은 채광실적을 올리기도 하셨다.

이런 산업관계 하나만 보아도 도주께서는 단순히 인격위로서도 경세가(經世家) 또는 사업가적 소질이 풍부하셨으며 본부 건물의 설계 시공, 단청 등도 몸소 지휘하신 해박한 경륜과 지식의 소유자이셨다.

7) 잠룡(潛龍)·회룡(廻龍)·해방(解放)

도기 27(1935=乙亥)년 섣달 그믐에 무극도의 해산과 잠룡도수를 선포하시고 다음날인 정월 초하루 새벽에 잠어(潛御)하셨다.

그것은 왜정 총독부의 종교단체해산령 때문이었는바 그 후 도장부지 건물과 재산 일체가 몰수당하여 경매 처분되었다.

이 사건에 앞서 전북 도지사가 직접 찾아와서 일본의 황민화 정책에 협력할 것을 요청했으나 민족적 정기와 종교적 신념으로 강력히 거부하신 사실이 있었음을 진경은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은 구천상제께 계시로 하신 말씀 그대로 천기요 도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