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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산 전기
제 목 3. 봉천명과 득도(奉天命과 得道)
작성자 작성일 2012-01-01
파 일

奉天命과 得道
 
이 가문의 충국 애민하는 정신은 가통(家統)이 되어 내려왔지만 취당공의 순사 이후에 복우도장 3형제분의 애국충정은 더욱 강한 배일사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원래 3형제분 중 도장께서는 천성이 관후인자(寬厚仁慈)한  문사(文士)이셨으나 두 계씨는 성정(性情)이 강하고 굳세며 담력조차 커서 무사(武士)기질이었다. 하루는 도장께서 동생들을 불러 중대한 결의를 하고 그 직접 행동에 관한 수의를 하게 되었다.“우리가 조상 대대로 이어받은 가통, 특히 순국하신 아버님의 한이 맺힌 항일 구국운동에 직접 나서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지금 각처에서 나라를 찾으려는 의병들이 일어나 젊은 피를 쏟고 있는데 우리 3형제가 무사 안일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을 수 있느냐?”하는 도장의 비장(悲壯)한 말씀에 서산공이 의견을 내었다.“형님! 마산에 사는 산본(山本)이란 왜놈을 아시는지요. 그가 광산으로 돈을 벌어 거기에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으로 우리 민족의 고혈(血)을 착취(搾取)하고 있으니 그의 돈을 빌려서 독립운동을 합시다!”


“그놈이 순순히 응할까?”
“담보를 대고 이자를 배로 준다고 하면 응할 겁니다”


이때 막내 계씨 신산공은 그저 두 형님이 하자는 대로 신명을 바쳐 뛰겠다고 다짐하며 부채질을 한다.그래서 산본에게 돈을 빌려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한다는 기상천외(奇想天外)의 결의를 했던 것이다.그것도 산본에게 적은 돈을 꾸어 신용있게 갚은 다음 그가 자진해서 거액을 대부하도록 하였다.“당신들은 지방 유지이고 신용도 있으니 많은 돈을 가져다가 3칠(옛날 칠원 3개 면의 별명)일대의 땅을 모두 사시오. 내 얼마든지 빌려 드리겠소이다”하고 산본이 도리어 달라붙는 것을 처음에는 사양하는 듯 하다가,“그래도 담보는 우리 3형제의 전재산을 당당히 제공하겠으니 우선 5천원을 빌려주시오”해서 5천원을 빌리기에 성공하였다.그런데 이때 산본의 속셈은 토지는 대부금의 배로 잡고 평가는 반으로 해서 3칠일대의 토지 전부를 착취하겠다는 수작이었다.사실 그 5천원은 당시 싯가로 상답(上畓) 수 10만평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으며 거금이었다 (회문리 앞 들이 지금도 ‘산본들’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이 담보사건으로 그 들 거의가 한 때 산본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라 한다).도장 3형제분은 신용 반 담보 반으로 빌린 돈 5천원을 가지고 우선 칠원(漆原) 도덕골에 화약공장을 설치하는 한편 무기를 수집하다가 왜헌(倭憲)에 밀고되어 피신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때 정산께서는 14세 어린 나이였지만 어른들에게 항일구국(抗日救國)을 위하여는 국외(國外)로 나가야 함을 진언하셨다.

그래서 1년간의 준비 끝에 중국 연변 곧 만주의 서간도지방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기유(己酉)년 (서기 1909년=한일합병 1년전) 4월 28일 미명에 창원역에서 기차로 전가족이 망명길에 올랐다. 태극도에서 이해를 도력기원(道曆紀元)의 원년(元年)으로 정한 것은 다음과 같이 천명(天命)을 받든 기사(奇事)에 연유한다.이날 하오 1시가 지나 기차가 대전부근에 이르렀을 때 정산은 마음공부의 입신(入神) 경지에서 한 신인(神人)을 대하셨는데 그 신인은 정산에게 ‘일광(日光)같은 얼굴에 황금색 용포(龍袍)...... 우뢰같은 음성으로’ 이렇게 명령하셨다.“내 그대를 기다린지 오래노라. 그대는 삼계(三界)의 진주(眞主)니 그대가 나의 도통(道統)을 이어 무극대운의 대공사(大公事)를 성취하되...... 태극의 진법(眞法)을 용(用)하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광구삼계(匡救三界) 하리라. 그대의 호는 정산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간(甑鼎之間)이며 이도일체(以道一體 : 도로써 한 몸)니라”하고(물론 이것은 옆사람도 모르는 심령계의 일이다) 이어서 “나는 구천(九天)의 천존상제(天尊上帝)로라”라고 하셨다.

이것이 정산의 대오자각(大悟自覺)이었으니 이때 나타난 신인의 당체(當體)가 구천의 천존상제이신 무극주(无極主)로서 신미(辛未=1871)년 9월 19일 전라도 고부(古阜)에 인신으로 강세하셔서 신축(辛丑=1901)년부터 9년간 광구삼계의 도수를 짜신 끝에 이날 김보경, 이치복 등을 거느리시고 대전역 근처에서 공사하신 강증산(姜甑山) 상제이시다.

정산께서는 이 천명을 받들어 태극의 참 주인<眞主>이 되시고 증산과는 솥과 시루의 관계로서 이도일체되는 신계(神界)의 비건(秘鍵)을 체인(體認)하심으로써 증산상제의 도통을 계승하신 것이다.종교의 위인이며 신인(神人)적 존재는 연령이 문제가 아니니 이때 정산의 나이는 15세의 소년이었지만 이때부터 진법(眞法)의 50년 공부가 시작되고 따라서 태극도의 도력(道曆)이 기산(起算)되는 것이다.만주에서는 요령성 유하현 수둔구(水屯溝 : 현재는 지명의 뜻 그대로 수풍댐의 물에 잠겼다 함)라는 곳에 정착하였는데 여기서도 어른들은 농사로 생계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동지를 규합하니 그곳은 그새 한인촌(韓人村)을 이루었다.정산께서는 천계(天啓 : 天尊 곧 상제님의 계시)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농사에 임하시면서 밤에는 마음공부를 계속하다가 그해 추수후에야 부친에게 말씀드리셨다.“소자는 지난 4월 망명할 때 구천상제의 천명과 신교(神敎)를 받들었습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의 공부만으로써 부족하므로 이제부터는 이곳 노고산(老姑山)에 들어가 천명에 따른 진법공부에만 전념하겠나이다”하고 여쭈어 승낙을 받은 다음 산속 은적한 곳에 공부처를 마련하고 홀로 두문불출, 불철주야 공부에 정진하시는데 여름은 그렇지만 겨울에는 만주의 혹한(酷寒)에 소년의 몸으로 겪으신 고난은 형언할 수 없으셨다.이러한 사이 경술년에 조국이 일본에 병탄(倂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산의 가족들은 3일간 망배통곡(望拜痛哭)하고 항일 투쟁의 결의를 더욱 굳게 다졌다.


 
당초에 복우도장께서는 수둔구에서 황무지를 매입, 개간하여 정성으로 경작한 결과 해마다 풍작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것을 시기한 만주인 전 지주들이 한국인을 만만히 여기고 땅을 돌려 달라고 시비를 걸어 작당행패하며 소송까지 하는 사건을 일으켰다.이때 한인촌에서는 도장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저들을 격퇴시키고 또 승소함으로써 한·만인(韓·滿人)들의 신망을 얻은 도장께서는 촌장(村長)으로 추앙을 받으셨다.그 후 이 마을의 단결이 더욱 굳어지고 명성이 전파됨에 따라 망명지사들이 이곳으로 찾아들어 그 연락처가 되고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그 결과 도장께서는 계씨인 서산공을 용정(龍井)에 보내어 독립군을 양성하는 이동녕(李東寧)에게 자금을 전달하고 격려하셨다. 

           
이 당시의 독립지사들에게는 갖가지 재난이 있었으니 도장께서도 보황당(保皇黨 : 중화민국에 대항하여 과거의 황제를 옹립하고 청조의 복구를 도모하려는 당파)과 동류라는 혐의를 받아 원세개(袁世凱) 정부에 구인(拘引)되어 극형을 받게 되는 큰 변고가 생겼다.
이때 정산께서 심양(瀋陽=奉天)까지 수행하여 그곳 관헌에게 해명 호소하셨으나 되지 않아 북경으로 가서 직접 원세개 총통에게 “우리는 한국인으로서 오직 항일(抗日) 운동을 할뿐”이라는 요지의 진정서를 내셨더니 원세개가 그 문장과 효성에 감탄하고 즉시 무죄 방면토록 하였다.
그동안 만주에 와서 황량한 풍물만 접하시던 정산께서는 심양에 와서 봉천으로 개명된 사실(이것은 도주님의 봉천명(奉天命)에 연유(緣由)한다)을 알게 되시고 북경에 와서 중국 본토의 웅대한 산천과 화려한 문물에 접하면서 대중화도수(大中華度數)를 공부하기로 결심하셨다.
북경서 산동(山東)으로 가서 태산의 공자묘(孔子廟)를 비롯한 명산대천에서 공부를 계속하시고 하남(河南)의 노자묘(老子廟), 등봉(登封)의 소림사(少林寺), 산서의 관왕묘(關王廟) 등 묘우(廟宇), 사찰(寺刹)을 6개월에 걸쳐 두루 편력 수도하셨다.
한편 숙부인 서산공이 독립운동의 혐의로 왜헌(倭憲)에게 체포되어 3년 징역을 언도받고 안동(安東) 형무소에서 복역하는 관재가 있었지만 정산 부자의 교섭과 청원으로 1년만에 출옥하였다.
이때 용정에서 활약하던 이동녕, 이시영 등이 간도지방의 흉년과 왜헌의 횡포가 심하여 상해로 이주하게 되자 도장 형제들은 그 자금을 마련하여 도장과 정산께서 상해로 가서 전달하게 되었다. 이 계제에 정산께서는 지난번에 마치지 못한 대중화도수공부를 계속하셨다.
현대의 종교인에게도 신명의 계시(啓示)나 영능(靈能)이 있는이가 있다. 그리고 영계와 교유(交遊) 상통(相通)하는 이가 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반드시 고급신과의 영통이 아닌 저급신 또는 잡신인 경우라는 것을 많이 보고 듣는다.
정산께서는 그런 의미에서도 최고 신인 구천상제(九天上帝)의 계시를 통한 직접적인 명령과 가르침을 받들면서 정진하신 것을 여러 전기(傳記)를 통하여 넉넉히 알 수 있다.
정산께서는 정사(丁巳=1917)년 설날 새벽에 초패왕(楚覇王)의 고향인 절강성(浙江省) 회계(會稽)에서 구천상제의 계시로 득도(得道)의 명을 받드셨다.
“이제 그대의 대중화 보은공사{報恩公事 : 보은신(報恩神)을 중국에서 한국으로 넘겨와서 소중화(小中華=한국)를 대중화가 되도록 증산상제께서 짜 놓으신 도수(무극진경 8 : 168, 169, 212, 9 : 45 참조)를 풀어 맞추시는 공사}가 끝났으니 본가로 돌아가서......도통(道統)의 연맥과 인계의 인연을 다지도록 하라. 이 곧 득도니라.”

이때 기도주(祈禱呪)와 태을주(太乙呪)를 직접 계시받으시니 이러하였다.

“기도주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지기금지 원위대강”

“태을주
훔치훔치 태을천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바아”

이해 윤2월 10일 노고산 공부처에서 천계(天啓)에 따른 득도치성을 올리신 다음 또 운장주(雲長呪), 칠성주(七星呪)와 그 밖에 다섯가지 주문을 받들고 도통(道統) 계승의 득도를 확인 받으셨다.
정산께서는 9년전 봉천명(奉天命)때 구천상제의 증정지간(甑鼎之間)이며 이도일체(以道一體)라고 하신 가르침을 다시금 자각 명심하고 더욱 수도에 정진하셨다.
이 무렵 용인(龍仁) 사람으로 만주에 와서 독립운동을 하던 오석(烏石) 김혁(金赫)이 군자금 관계로 수둔구에 찾아오니 그는 도장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내는 처지였다.
그는 왕년에 본국을 순회하다가 증산상제의 성도(聖徒)들로부터 그 행장과 교훈을 듣고 입도한 바 있는데 여기에 와서 정산의 공부방법과 그 주문이 조금도 틀리지 않음을 보고 경탄하였다.

“조군, 그 주문을 어디 누구에게서 배웠는가”하는 오석의 물음에,
“공부중에 상제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하고 대답했지만 자신이 진법의 진주(眞主)로서 이도일체라는 비의(秘義)는 발설하지 않으셨다.
“참 신기한 일이로군. 군의 공부가 이토록 극상위(極上位)에 있는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네. 연령으로는 내가 어른이지만 종교상으로는 군이 나의 스승이로세”하고 오석은 정산을 우러러보았다.
이해 4월에 정산께서는 다시 구천상제의 계시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오시게 된다. 이때의 계시내용이,
“빨리 환국(還國)하여 나의 본소(本所)를 찾고 3천(三天)인 천서(天書)·천보(天寶)를 받도록 하라”는 것이었으므로 남자로 변장시키신 매씨(妹氏)와 종제(從弟)만을 거느리고 출정(出程)하셨다.
출발 전날 마지막 떠나는 길이라 노고산에 있는 관왕묘(關王廟)에 참예(參詣)하셨는데 이튿날 새벽에 묘지기가 찾아와서 문전에 부복하고,
“대인(大人)께서 어제 관왕묘에 다녀가신 후에 관성제군의 상에 수염이 없어졌습니다. 이로써 소인은 중벌을 면치 못하오니 대인께서 도력(道力)으로 복구시켜 주옵소서”하며 애원했다.
정산께서 웃으시며,
“그래, 네 소원을 들었으니 돌아가서 다시 살펴보라”고 하셔서 묘지기가 돌아가보니 옛모습 그대로이므로 사례코자 찾아왔으나 정산께서는 이미 떠나신 후였다
還國과 三天完備

 
귀국길을 안동까지는 마차편으로 와서 압록강철교는 도보(徒步)로 건너 신의주에서 기차를 타기로 하셨다.
국경인 철교 위에는 양쪽에서 검문하는 군인들의 경계가 삼엄했는데 이상하게 정산일행은 그들이 보지 못하므로 그저 통과하였다.
철교를 건너면서 정산께서 혼자말을 하시는데 그것이 한국어도 중국어도 아닌 것이어서 매씨가 이상히 여기며 여쭈었다.
“오라버님, 지금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까?”

“응, 서양 신명들이 내게 무엇을 물어오는데 이야기하자니 그리 되었느리라”하셨다.
압록강을 건너신 후에 강변의 어선에서 5색이 영롱(玲瓏)한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사셔서 강물에 놓아보내셨다. 이때 그 고기가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솟아올라 네 번 절을 하듯 몸을 번득이고 유유히 사라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매씨가,“오라버님은 어찌하여 비싼 값으로 고기를 사서 물에 놓아보내시나이까?”하니,“고기나 사람이나 살려고 함은 본능(本能)이 아니냐. 더구나 이제 그 고기는 용왕(龍王)의 명으로 나의 귀국(歸國)을 영접하러 왔다가  나와 상봉(相逢)함이니라”하셨다.
신의주에서 철도편으로 서울에 오셔서 며칠을 유하시며 관광하는 동안 그곳 백성들의 신고하는 정황을 살피시고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셨다.
다시 철도로 밀양 외가를 찾으시니 외척들이 모두 환대하였고 이튿날 칠원 회문리 고향에 가니 일가 친척 역시 반가이 맞아 주었다.

그러나 정산께서는 이러한 사정에만 시간을 보낼 수 없고 구천상제께서 명하신 본소(本所)를 찾기 위하여 다시 매씨를 거느리고 호서·호남방향으로 출발하셨다.
5·6월 염천의 혹서를 무릅쓰고 걸음을 재촉하여 몇달 몇날에 걸쳐 지친 몸을 이끌고 정읍의 손바래기, 모악산의 금산사, 대원사와 동곡(銅谷)등 증산상제의 성지와 유적지를 답사하고 김형렬, 박공우, 이치복, 김광찬 등 성도(聖徒)들을 찾아 본소를 탐색하기에 노심하셨다.
그해 9월 어느 날 함열(咸悅)지방을 지나시다가 피로한 몸으로 정자나무 아래 쉬실 때 구천상제의 계시가,
“본소는 다음에 찾고 우선 이곳 서해의 제일도에 공부처를 정하고 때를 기다리라”하시므로 태안의 안면도(安眠島)를 찾아드셨다.
이곳에서 첫 포덕으로 입도한 이정률(李正律)의 주선으로 정당리 어락골의 공부처를 매입하여 우일재(宇一齋)로 명명하신 다음 이해 겨울에 만주의 도장이하 모든 가족이 합솔하여 함께 입도치성을 올렸다.
그 다음해 봄까지 입도자가 30여명이 되었는데 정산께서는 그들을 우일재에서 기도주·태을주를 연송(連誦)하며 공부하게 하셨다.
그 공부 7일째 되던 날 진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도인 박봉운(朴奉云)이 공부중에 갑자기 큰소리로,
“나는 뵈었다. 옥황상제님을 뵈었다”하고 일어나서  춤을 추며 크게 웃기도 하였다.

다른 도인들이 당황하여 말려도 안되는데 옆방에 공부하시던 정산께서 “봉운아”하고 부르시니 갑자기 멈추며 그 앞에 나아가 부복하고,
“옥황상제님께 절을 올립니다”하며 4배(四拜)를 올렸다. 봉운이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모두에게,
“내가 천상의 옥황상제를 뵈었는데 바로 이 어른이 그 어른이시니 함께 다시 4배를 올립시다”하므로 일동이 신기하게 여기며 4배를 올렸다.
봉운이 그 후에도 몇번 그러하므로,

“오직 천기라......이는 허령이니 이를 거두노라”하셔서 중지 시키셨다.
무오(戊午=1918)년 8월에 정산께서는 증산상제의 본소(本所)를 찾기 위해 다시 전라도로 가셔서 상제의 옛 성도들을 찾아 수소문하기로 결심하시고 먼저 원평(阮坪)의 김자현(金自賢)을 방문하셨다.
그러나 그는 손을 나발 모양으로 오므려 자기 입에서 정산의 귀에 연결하고,
“증산선생께서 이렇게 하시며 ‘도통(道通)은 자네에게만 주겠네’하셨다”고 하면서 자랑했지만 본소를 찾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정산께서는 다시 안면도로 돌아와서 공부를 끝마치시고 10월에 전라도 정읍군 감곡면 황새마을로 오셔서 새로운 공부처를 마련하시고 가족들도 합솔하여 포덕에 힘쓰신 결과 수십명이 입도하게 되었다.
이처럼 도인이 늘어나고 공부를 계속하시면서도 항상 증산상제의 본소를 찾지 못한 일만이 마음의 숙제가 되어 있으셨다.
기미(己未=1919)년 정월 보름날 명절 치성으로 철야하고 공부하시던 중 드디어 구천상제의 본소에 대한 계시가 내렸다.
“때가 이르렀으니 이제 본소가 그대 목전(目前)에 다가왔도다......”고 하신 것이다.
정산은 이날 눈이 많이 내리는 가운데 자신을 찾아오는 박씨라는 여인을 천안(天眼)으로 미리 볼 수 있으셨다.

그는 정산께,
“증산상제의 매씨 선돌부인께서 ‘후천진인(後天眞人) 을미생(乙未生)에게 도통(道統)을 전하라’하신 상제의 명령에 따라 10년간 본소를 지키다가.....오늘 아침 천계(天啓)를 받들고 ‘만주봉천서 오신 대인을 모셔 오라’고 하셨나이다”하므로 따라가서 증산상제의 유족(遺族)을 비로소 만나시게 된다.

선돌부인께서는 이때 39세셨는데 일찍이 20세 전에 고부 입석리 박창국에게 출가하셨으나 10년이 넘도록 소생이 없자 남편이 소실을 두고 소박(疏薄)하므로 증산상제께서 이곳 마동에 집을 사 주셔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화천(化天)하시던 해 정월 보름에는 이 집을 몸소 수리하셔서 도배까지 해 주시고,
“이곳이 나의 본소(本所)니라”하시며 위와같은 명령을 내리셨던 것이다 (이때 천서를 비장(秘藏)하신 것으로 추측됨).

부인께서 이 본소에 사시는 동안 5년 전에는 황해철이란 수도인이 찾아와서 공부하다 돌아가고 4년 전에는 박모란 수도인이 그 제자 송규를 데려와서 부탁하므로 3년간 공부시켰으나 성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증산상제의 지엄한 계시에 따라 강제로 내 보낸 일이 있으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제께서 직접 계시로써 정산의 얼굴까지 보여 주셨으므로 의심의 여지는 없었지만 상제의 유품은 황·송에게 내주고 회수할 길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정산을 맞은 권씨 대모(大母 : 강증산상제의 모친)께서는, “내 아들과 같은 진인을 대하니 여한이 없다”하며 감읍하셨으나 선돌부인께서는,
“이제야 진인을 만나 소임(所任)을 다하게 되었다”하고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망히 여기셨다.

그런데 이곳에서 사람의 의표(意表)로서는 상상치도 못할 역사적 사실이 전개된다. 정산께서는 이때 문득 ‘진시황의 분시서(焚詩書) 갱유생(坑儒生)에도 칠서(漆書)가 공자의 집 벽속에 비전(傳)된 칠서벽경(漆書壁經 : 공자가 그 당시 대쪽으로 된 경서를 옻칠해서 자기집 벽속에 감추었는데 200여년 후에 그 집을 새로 지을 때 벽속에서 썩지 않고 나옴으로써 유교가 후세에 전해진 것에서 유래된 말)의 고사(故事)’가 상기되시어 마음 속으로 ‘증산상제께서 이 본소를 내게 점지하여 주셨으니 도통(道統)의  증표도 내려 주실 것이다’ 생각하시고 선돌부인에게,
“구천상제의 진품증표는 절로 진주인 나에게 전수될 것을 확신하오니 심려하지 마시오”하시자 앉은 자리의 바로 뒷벽 천정 아래의 한 곳에서 섬광이 번쩍이는 것을 느끼셨다.
그곳의 도배를 뜯고 벽을 파시니 그 안에 나무상자가 있었으며 그 상자를 여시는 순간 전광(電光)이 뻗치며 집과 벽이 진동하는데 상자속에 천장비서(天臧秘書) 곧 천서인 현무경(玄武經)과 주문서(呪文書)가 들어 있었다.
정산께서는 천서를 향하여 4배를 올리고 심고(心告)하신 다음 정중히 내려서 유족들에게 확인시키셨다.

대모께서는,
“이 방안에 살면서도 이 천서가 있는 줄 몰랐는데 그대가 이렇게 찾아내어 물려받게 되니 참으로 그 상제에 그 진주(眞主)로다”하시고 선돌부인께서는,
“이로써 나의 소임 또한 다함이라”하시며 모두 감격해 마지 않았다.
현무경은 4방 9촌의 한지에 증산상제께서 손수 쓰신 것으로서 13장 26면에 문자와 부도(符圖), 주문서는 7장 13면에 11종의 주문이 기록되어 있었다.
정산께서는 이 천서를 받들고 본소에서 백일공부로 그 진리를 체득하셨으며 이때부터 증산상제의 유족을 봉양하셨다.
이해 3월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정산께서는 이에 관하여,
“이 운동은 구천상제께서 미리 짜놓으신 도수에 의한 일이다”하시며 부친 형제분과 전 도인에게 적극 참여할 것을 당부하셨다.
그로써 주저하고 있던 도인들까지 전국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본소와 천서에 관한 소문이 두루 퍼지니 입도인이 날로 늘고 황새마을 공부처는 문전성시(門前盛市)를 이루어 협소하므로 이해 5월 초순부터 그 이웃 청도리 구성산 학선암에서 백일공부를 하시고 윤 7월에는 공부처를 다시 같은 면 통사동(通士洞) 이씨 재실 영모재(永慕齋)로 옮기셨다.
9월 18일 정산께서는 통사동 공부처에서 구천상제 강세치성(降世致誠)에 앞서 증산상제의 유족과 상의하신 다음 가족과 도인들에게,
“3천(三天) 가운데 2천은 이미 받들었으나 남은 천보(天寶)도 받들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천보는 둔궤(遁櫃)였다.
둔궤는 원래 증산상제께서 화천 전년(1908) 여름에 동곡 약방을 차릴 때 약장과 함께 만드시고,
“이 궤속에 번개가 들어야 한다”, 또 “이는 나의 도지(道旨)와 도통(道統)을 숨겼으므로 숨길 둔자 둔궤니라”하시며 약방에 비치하시고 많은 도수공사를 보신 신성한 유물로서 화천하신 후에 김수부(金首婦  : 김형렬의 따님)가 간직하더니 고수부(차경석의 이종 누님)가 교단을 차릴 때 가져갔는데 고수부가 교단을 떠난 후 이때까지 보천교에서 간수하고 있었다.


정산께서는 이날밤 천하장사 김계철, 최승오와 도인 권태로 등 8인을 거느리시고 보천교 도장에 가셔서 마침 이때 치성에 모였던 수백명 교도에게,
“천명을 받들어 천보를 모셔가니 순순히 응하라”고 외치셔서 알리게 하신 다음 그 본당에 안치된 둔궤를 모셔오셨다.
그리고 통사동 공부처에서 둔궤를 모시고 공부하시다가 다시 경남 함안 대산면 용화산의 반구정(伴鷗亭 : 그 13대조의 재실)에 옮겨 모시고 백일공부를 하셨다. 그런데 이 둔궤의 자물통은 증산상제께서 채워놓으신 그대로였으나 공부를 마치시던 날 열쇠 장인(匠人)을 시켜 새로 열쇠를 만들어 여셔도 안되다가 정산께서 직접 주(籌)대(공부하실 때 쓰시는 산(算)가지)를 자물쇠에 끼우시는 순간 뇌성벽력이 나며 방안이 갑자기 어두었다 밝아지며 스스로 열리는 이적(異蹟)이 일어나니 이날이 경신년 2월 17일(양력 4월 초5일) 청명절이었다.
정산께서 둔궤 내부를 살피신 다음,


“과시(果是) 천보로다. 수운(水雲)의 거년(去年) 경신(庚申) 4월 초 5일은 음력이로되 나의 금년 경신 4월 초 5일은 양력이니 음양합덕이며 태극도수가 분명하도다”하셨다.
둔궤 안에는 양피(羊皮) 한 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들어있고 내부의 정면과 좌우면에 ‘오강록(烏江錄), 설문(舌門), 반구제수(半口齊水), 천문지리(天文地理), 풍운조화(風雲造化), 팔문둔갑(八門遁甲), 지혜용력(智慧勇力)’ 등의 비서(秘書)가 불지짐으로 새겨져 <火刻> 있었으며 주사(朱砂)로 24점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정산께서는 이로부터 반구정 아래 강가 백사장에 단(壇)을 모으고 그 위에서 밤마다 장·중·단검 세자루(밀양 운문산 천황봉 아래에 철공소를 차리고 성기춘 등 기술자를 시켜서 풀무불에 만국지도를 매일 1장씩 50장을 소화하시며 만드신 칼)로 100일간 검무(劍舞) 도수로 공부하셨다.
이때 정산께서 낮에는 반구정 공부실에서 수도하시고 밤에는 단 위에 등불을 밝히고 검무도수로 공부하시는데 그때마다 지척(咫尺)을 분간할 수 없이 구름 같은 안개가 일어 시종들은 공부하시는 내용을 볼 수 없었고 다만 안개 속에서 간간이 칼 부딪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공부 후에 통사동으로 돌아오실 때 칼은 가져오시고 둔궤는 반구정에 두고 오셨는데 수종(隋從)하던 조주일(曺周一)이 몰래 가지고 진주지방으로 도망가서 사술(詐術)을 부리다가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상우가  정산께 찾고자 함을 아뢰니,
“둔궤는 이미 도수에 쓰였으니 이제는 한낱 궤짝에 불과하고 둔자는 도망 둔(遁)자이므로 도망자의 물건이 됨은 필연이라. 후일에도 이런 배신 난법자가 있으리라”하시며 찾지 말도록 하셨다. 정산께서는 검무도수 공부를 이해 11월 초부터 100일간 안면도 쇠섬에서 단도수와 아울러 공부하시니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바람막이 하나 없는 섬에서 동상으로 수족이 붓고 손마디가 터져 피가 나는데도 계속하셨다.

이 단도수와 검무도수 공부는 다음해 2월 다시 부안 변산반도 우금바위 아래로 옮겨서 100일간 계속하셨는데 일본 순사가 취체하러 나왔다가 눈 앞에 있는 단과 단상의 기를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간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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