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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5. 무극대도 창립(无極大道 創立)
작성자 작성일 2012-01-01
파 일

无極大道 創立
 
이해(辛酉=1921년) 4월 28일의 봉천명일 대치성을 기하여 참으로 종교사상에도 큰 역사적 사실이 전개되었으니 그것은 정산께서 봉천명이래 13년간 공부해온 도(道)가 바로 무극대도이고 자신이 그 도주임을 천하에 고(誥)하신 일이다.


이날 정산께서는 통사동 공부처에서 이렇게 언명하셨다.
“내가 13년전 오늘 천명과 신교(神敎)를 받들어 구천상제님께서 물샐 틈 없이 짜놓으신 도수를......성취하였노라......그 원강(原綱)은 오직 무극대도라. 천명, 천서, 천보의 삼천(三天) 대운(大運)에 부합하여......이는 내가 구천상제님의 도통계승자임이 실증됨이라. 이에 나 스스로 무극대도주의 권명(權名)을 천하에 고하노라”
이날 치성때에 맑은 하늘에 번개가 치고 뇌성이 진동하였는데 이것을,
“뇌성보화천존(雷聲普化天尊)상제께서 하감흠향(下鑑歆饗) 하심이니라” 하셨다. 그리고 도인들로부터 도주 취임의 하례를 받으시고 도의 체제를 갖추어 임원을 임명하셨다.


5월에 그동안 남의 소유가 되었던 회문리 옛집을 서산공으로 하여금 복원(復元)하게 하시고 그 가족을 이사시켜 고기(故基)와 선영(先塋)을 수호하게 하셨다.


무극대도를 선포하신 후에도 정산 도주님은 다시 백일공부를 시작해서 8월 중순에 마치셨다.
이해 9월 초5일은 도의(道義)적으로 의의 깊은 날이다. 그것은 이날 도주님께서 도로서는 도조(道祖)가 되시고 도의로서는 신앙의 대상이신 구천상제로 받드는 증산상제님의 도통(道統)을 계립(繼立)하신 진주이지만 재세시의 인신(人身)으로는 직접 받들지 못하심을 대신하여 그 성체(聖體)를 모셨기 때문인 것이다.


도주님께서는 이날 증산상제님의 모친 권씨 대모와 상의하신 다음 혈연(血緣) 유족(매씨 선돌부인, 따님 강순임)과 임원들을 대동하고 김제 청도리 동곡 뒷산의 증산상제님 빈소(殯所)에서 고천의례(告天儀禮)를 올리신 후에 그 성골(聖骨)을 수렴(收殮)하여 통사동 영모재 공부실로 옮겨 봉안하고 대치성을 올리셨다.
이로부터 조석상식(朝夕上食)과 삭망절사(朔望節祀)를 법도대로 몸소 봉행하시니 이것이 삭망도수였으며 이 도수에 따른 백일공부를 하시며 이러한 한시 한수를 읊으셨다.

 
“時時默誦空山裏
 夜夜閑聽潛室中
 分明造化成功日
 堯舜禹王一切同”
(항상 잠잠히 빈 산 속에서 외우니,
밤마다 한가로이 잠긴 방 가운데서 듣는다.
분명히 조화가 성공하는 날에,
요, 순, 우왕이 일체로 같으리라.)


이무렵 도주님께서 구천상제의 성령(聖靈)을 봉안하고 도단(道團)의 본부가 될 도장(道場)의 영건(營建)을 임원들에게 명하셨다.


이에 도장영건 추진위원회가 구성되니 그 도유사(都有司)를 서산공으로 하고 각 도·군의 유사가 선정되어 이들의 활동으로 이해 연말에 도장영건 기금(基金)으로 3만원의 성금이 원납(願納)되니 이것이 원납도수였다.
도주님께서는 만주 망명시절에 의흥 예씨(芮氏 : 휘 鍾麟, 도호 崇道夫人)와 결혼하셨으나 예씨께서 10년이 넘도록 태기가 없으시므로 이해 11월에 부모님의 주선에 따라 전주 이씨(李氏 : 휘 金漢, 도호 崇政夫人)와 결혼하셔서 비로소 인신으로서의 후사(後嗣)를 두게 되신다.

임술(壬戌=1922)년 정월 23일 밤중에 폭도 20여명이 공부실에 침입하여 상좌에 모신 상제님의 성골과 도장기금의 일부를 빼앗아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도주님께서는 모든 임원들을 지방포덕에 보내신 다음 영모재 공부실에서 우수절(雨水節) 절후치성을 입절(入節)시각인 술시에 올리시고 참례원인 도장(道丈) 내외분, 선돌부인, 숭정부인과 도인 몇사람은 폭도들이 몰래 몽혼약(昏藥 : 마취제)을 타넣은 음복을 하고 일찍 잠들었다가 폭도들의 습격을 당한 것이다.
폭도들은 저마다 몽둥이를 들고 와서 참례원들을 사정없이 때리고 마당으로 끌어내어 묶어 놓았으며 도주님께서는 이때 공부실의 중요 물품을 미리 챙겨 놓으신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가시는 데도 폭도들이 알아보지 못해 무사하셨으나 도장께서는 주무시다가 그들의 몽둥이에 맞아 오른손목의 뼈가 부러졌는데 병원에서 치료하셨으나 완쾌되지 않으셨다.


도주님께서 폭도들이 돌아간 뒤에 공부실을 살피시니 왼손 성골이 남아 있으므로 천지도래일장중(天地都來一掌中)의 뜻을 되새기시며 수습하셨다.


그 후에도 폭도들이 도장기금 전부와 증산상제의 왼손 성골을 강탈하려는 행패가 계속되므로 도주님께서는 대전의 빙댁(聘宅)으로 옮기셔서 공부하셨는데 저들이 거기까지 찾아와서 행패하다가 결국 경찰에 넘겨져서 실형을 언도받음으로써 사건이 종결되니 이것이 음해(陰害)도수였다.


3월에 도주님께서 통사동 공부처를 폐쇄하시고 서울 도화동에서 백일공부를 하셨는데 이때 서울의 명사급 인사들이 많이 입도하였으며 윤 5월에 다시 돈암동에서 제2차, 9월에는 적선동에서 제3차 백일공부를 단 위에 태극기와 만국기를 세우시고 하시는 동안 포덕에도 힘을 쓰셨다.


이로써 3처 3도(三處三度)의 서울도수를 성취하신 것인데 이때 도주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을 60년이 지난 후에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되어서야 도인들은 비로소 ‘도주님께서 과연 진법의 진주이신 동시에 바로 태극주, 옥황상제로서 시행하신 도수공사가 여실히 실현되는 것임’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는 조선의 서울이 태극의 중심이 되는 도수라. 1갑(一甲 : 60년)이 지나면 천하 만국인이 가슴에 태극을 품고 서울로 와서 세계일가( 世界一家)의 기틀을 다지며 환호하는 날이 있으리니 그 아니 장하랴. 그러나 그대들은 새 서울이 따로 있음을 알지니라”


“그 1갑이 지나면 나의 태극진리도 문명(文命)으로 화(化)하여 새 서울에서 큰 소리를 치리니 시유기시(時有其時)며 시호시호(時乎時乎)니라”


“계해(癸亥=1923)년 정월에 서울도수 공부를 마치신 도주님 께서는 고향인 칠원 회문리로 오셨다가 밀양 세천(洗川) 김병문(金炳文)의 집, 유천(楡川) 장득원(張得遠)의 집에서 단(壇)도수, 둔(遁)도수, 납폐(納幣)도수 또는 진인보두법(眞人步斗法)으로 백일간씩 공부를 계속하셨는데 세천 공부 때 쓰신 납폐지를 후일 태인도장을 영건하실 때 그  영대 터에서 소화하셨다.


도주님께서 이해 6월 24일 상제님 화천일을 당하여 회문리 고기(故基)에서 대치성을 올리시고
“대도의 제왕지운(帝旺之運)이 다가오고 있느니라......세운(世運)을 자각하고 포덕 수도에 더욱 힘쓰라”하시며 전도문(傳道文)을 내리시니 세운과 도운(道運)을 밝히신 글로서 지금도 전해오고 있으므로 여기에 수록한다 (다만 이글이 해석하기 어려운 운율(韻律)의 한시(漢詩)이므로 간단히 직역을 붙였다.
“傳道文
七十九歲爲章
二十七章是會當
三會爲統三統元
循環往復互無疆
四六一七前丁巳
軒轅立極肇斯元
萬象萬事皆有定
諸法諸書總此源
傳頊勛華禹
初統初會世世聖
日出萬暉同發明
春回品物共華盛
初統之中降中季
聖不承承但一時
禹後有湯湯後文
一會一聖應會期
中統由來世漸降
聖不道行但敎傳
釋後有孔孔後耶
一會一敎各門筵
季統敎亦無肇聖
惟有述聖繼啓來
佛梁儒宋耶羅馬
一敎一昌應會回”
(도를 전하는 글
7회 윤달의 19세(연)는 1장이 되고,
27장(513년)은 1회에 해당한다.
3회(1539년)를 통으로 하고 3통(4617)을 원으로 하니,
순환하고 왕복하여 서로 끝이 없다.
지금으로부터 4617년 전 정사년에,
황제 헌원씨가 황극(皇極)을 세움이 원의 시작이다.
모든 현상, 모든 일이 모두 정함이 있고,
모든 법, 모든 글이 모두 이에 근원한다.
황제로부터 효, 욱, 곡, 훈, 화, 우임금까지 전함이,
첫 통의 첫 회(513년)에는 대대로 성인이었다.
해가 돋아나면 모든 빛나는 것이 함께 발명되고,
봄이 돌아오면 모든 물건이 함께 빛나고 왕성해진다.
첫 통의 중간과 마지막 회(1026년)에 내려오며,
성인이 이어지지 않으나 다만 한 때였다.
우임금 뒤에 탕임금이었고 탕임금 뒤에 문왕이었으니,
1회(513년)에 1성인이 회의 기간에 응한다.
중간의 통(3078년 전)이래로 세상이 점점 내려가서,
성인의 도가 행해지지 않고 다만 교가 전해졌다.
서가 뒤에 공자였고 공자 뒤에 야소(예수)였으니,
1회(513년)에 1교가 각각 교문의 자리를 이루었다.
마지막 통(1539년 전)에는 교도 또한 시작하는 성인이 없고, 오직 성인을 서술(敍述)하여 이어옴이 있을 뿐이었다.
불교는 양나라, 유교는 송나라, 야소는 로마에서,
한 교가 한번 창성함이 회(514년)에 응하여 돌아온다.)
이해 8월에 유천에서 공부를 마치시고 다시 청도 적천사(蹟川寺) 도솔암(兜率庵)에서 서울에서와 같이 단을 쌓고 그 위에 태극기와 만국기를 세우신 다음 백일공부로써 단도수를 보시며, “단도수의 단(壇)은 단(檀)과 같은 뜻이므로 단군의 명호도 이를 취함이니......해원의 대운이 제래(齊來)하게 되리라”하셨다.
이때 대도를 선포하신 지 3년, 도세(道勢)가 급격히 늘어났지만 그동안 음해도수 등으로 도장을 영건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임원들이 과거에 구성된 도장영건 추진위원회를 재정비하고 그 후보지를 도주님께 여쭈니,
“도장의 기지는 태인(泰仁) 도창현(道昌峴)이 천장길방지지(天藏吉方之地)니라......그러나 그곳에 치마바위가 있어야 한다”
하시고 이상우 등에게 찾도록 하셨다.
그들이 도주님 뜻에 가합(可合)한 곳을 물색하여 보고하매 몸소 가셔서 확정하시고 5천 5백평의 부지를 매입하게 하시니 댓가는 벼 3백 50석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은 그때의 치마바위란 그 부지의 표면에 솟아난 바윗돌 몇개였으나 명령에 따라 흙을 파서 대지를 정리하니 높이 약 3장(丈)에 길이 약 50칸이나 되는 성채(城砦)모양, 병풍모양의 바위가 신기한 경관을 이루었고 대지 중앙에서는 샘물이 솟아나서 후일 수천명의 용수에 넉넉하였으니(도인들은 이샘을 유천(乳泉)이라 불렀다) 과연 천장길방의 비경(秘境)이었으며 지금도 태인에 가면 누구나 다 치마바위의 뜻을 감지할 수 있다.
갑자(甲子=1924)년에 무극도 도장 영건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도주님께서는 그 설계와 시공의 세부까지 몸소 감검(鑑檢)하시는 한편, 5월에는 밀양 종남산의 영성정(靈聖亭)에서 납폐도수, 8월에는 대구 남산정에서 대구(大救)도수, 9월에는 멀리 중국까지 순행(巡幸)하시며 대중화보은(大中華報恩) 도수를 보시고 회문리에서 과세하신 다음 태인으로 돌아오셔서 도장공사를 독려하셨다.


도장 건물은 착공 2년만인 을축(乙丑=1925)년 4월에 영대(靈臺)와 도솔궁(兜率宮)이 완성되고 이듬해에 다른 부수건물들 모두가 준공되었다.
영대는 3층에 구천상제의 영위(靈位)를 모시고 1·2층은 집회장인데 총 48칸이고 도솔궁은 총 72칸으로서 4·3·2층에 33천(三十三天), 칠성신명, 육정신 등을 각각 모셨으며 1층은 중궁(中宮)이라 하여 도주님의 공부실로 하셨는데 영대의 외부는 2층이나 내부는 3층이고 도솔궁의 외부는 3층이나 내부는 4층으로 되어 웅대하고 절묘한 건물이었다.


그밖에 각종 회관, 사무실, 거실, 주방, 창고, 작업실 등 총 19동, 240여칸의 건물 모두를 청기와로 이<>고 전통 단청을 하여 참으로 장관을 이루었는데 공사기간 33개월, 노력인원 연 12만명, 공사비용 5만원이란 당시로서는 엄청난 공사였다.


이달 28일 봉천명일을 기하여 도장영건과 영대 봉안치성을 아울러 올리시며 상제의 영위를,
“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至神至聖聖靈之位”로 하여 모시셨다.
이 일을 축하해서 3일간의 연회를 베푸셨는데 그보다도 더 큰 일은 이때 무극대도의 ‘취지서’를 포유(布諭)하신 일이다.


“夫 道也者는 天所命而 人以行之者也ㅣ라 (대저 도라는 것은 하늘이 명한 바이고 사람이 행해야 하는 것이다)”로 시작되는 취지서를 비롯하여,
‘신조(信條) : 음양합덕(陰陽合德), 신인조화(神人調化), 해원상생(解寃相生), 도통진경(道通眞境)’과
‘4강령(四綱領) : 안심(安心), 안신(安身), 경천(敬天), 수도(修道)’
‘3요체(三要諦) : 성(誠), 경(敬), 신(信)’, 그리고 도단(道團)의 기본 규칙인 ‘도규(道規)’도 아울러 공포하셨다.


또 치성의례의 절차와 입도치성절차, 갑기일(甲己日)을 주일(主日)로 제정하시고 기도시의 절차와 봉송주문을 제정, 또는 교시(敎示)하셔서 대도의 조직체계와 의례 절차 등을 빠짐 없이 완비하셨다.
뿐만 아니라 20여 정보의 상수답(上水畓)을 매입, 본부의 직영경작으로 도단 경용(經用)을 자급(自給)하게 하시고 치성답 5천여평을 두셔서 치성미(致誠米)를 자족(自足)하게 하셨다.
이렇게 대도의 체제가 정립되니 도세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도인의 수가 수10만에 달하였다.
이해 9월 상제 강세치성 후에 ‘각도문(覺道文)’을 포유하시고 주문의 일부도 변경하셔서 봉송절차와 횟수 등도 교시하셨다.


이해 그믐에 한 임원이,
“도주님께서 새해에는 천자위(天子位)에 등극하옵소서”하고 여쭈니,
“나의 일은 한 나라의 일에 국한되는 군왕(君王)사업이 아니라......3계 전체를 개벽 광구(匡救)하는 공사니라”하고 훈교하셨다.


병인(丙寅 : 1926)년 봄에 회문리 구가(舊家)를 중수하게 하신 다음 그 옆에 회룡재(廻龍齋)란 아담한 정사(精舍)를 짓고 그 앞에 연못을 파게 하시며,
“이는 뒷날의 일을 예비하는 도수니라”하셨다 (이 회룡재가 10년 후부터 잠룡(潛龍), 회룡(廻龍), 현룡(見龍)으로 연결될 도수에 관련되는 것임을 20년이 지난 8·15광복 후에야 알게 되었다).
무진(戊辰 : 1928)년 설날 도주님께서 ‘포유문(布諭文)’을 내리셨다.”人生處世에 有何所欲고(사람이 나서 세상을 삶에 있어 무엇을 하고자 하느냐)”로 시작하여 “欽吾道友는 勖哉勉哉어다”로 끝마친 글이 뜻도 좋지마는 글도 명문장으로서 도인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처세훈(處世訓)이 되는 글이었다.
이해 봄에 청장년(靑壯年) 도인으로써 진업단(進業團)을 조직하시니 이는 도인들의 생활안정과 산업 장려, 빈민구제를 위한 것이며 각처의 수리(水利), 개간, 간척(干拓)등 사업에서 성·경·신을 신조로 하는 근무로써 사업장마다 신임을 얻어 좋은 실적을 올렸는데 이것을 단원(團員) 도수라고 했다.
이해 추석에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훈교하시기를,
“지금 우리 도가.......성화(盛花)의 국격이다. 그러나 개화(開花)에는 낙화의 도수가 따르느니라”하시고 한시를 읊으셔서 난국이 닥쳐올 것을 예시(豫示)하셨다.


“戊辰年來開花期......
......乙丙之間落花期”
(무진년부터의 개화 도수가......
......을해, 병자년에 낙화도수가 온다.)
기사(己巳 : 1929)년 9월 도인 15명을 뽑아서 개안(開眼)공부를 시키셨는데 7일만에 그들이 모두 천문지리(天文地理)며 의표(意表)밖의 일에 눈이 밝아졌으나 도주님께서는,
“이만하면 넉넉히 경험했을 것이다. 대도의 목적은 도통이라, 개안에 그칠 일이 아니니 이만 거두리라”하시니 일제히 그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경오(庚午 =1930)년 봄에 진업단을 증원시켜서 1개단 200여명은 북만주 목단강 근처로, 1개단 300여명은 함경도 무산으로 보내어 벌채사업에 종사케 하셨다. 진업단이 2년 후에 돌아올 때까지 왜경에서는 만주지방의 독립군과 합류할까 의심하여 그 해산을 강요하거나 벌채허가를 취소하는 등 여러가지로 방해하고 위협했으나 굴함이 없이 많은 성과를 올렸다.


진업단이 돌아오자 도주님께서는 미리 계획하신 안면도(安眠島)와 원산도(元山島)의 간척사업을 착공하게 하시니 안면도는 창기리(倉基里) 앞바다를 막아 80여정보, 원산도는 50여정보의 논과 염전(田)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 공사의 비용 또한 커서 현금 1만여원과 쌀 300석이었다.
간척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도주님께서 직접 공사장에 임하셔서 단원들을 위로, 격려하시고 다시 그 근처 쇠섬에 단을 모으고 그 위에서 조수(潮水)의 간만(干滿)을 살피시며 백일간 도수를 보셨다.


도주님의 산업개발의 의지와 그 생산교단으로서의 정립을 위한 포부는 실로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데가 있으셨다.
임신(壬申 : 1932)년 여름에 도단의 재정책임자 김병팔(金秉八)에게 명하셔서 전주 이서(伊西)의 사금광(沙金鑛), 충북 음성의 무극광산(無極鑛山)을 위시한 전국의 72개 광구(鑛區)를 출원하고 그 일부의 채광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셨다.


뿐만 아니라 개간공사, 하천공사, 수리공사, 도로공사 등 태인을 중심한 무극도 진업단의 비상한 활동업적을 여기에 모두 기록할 수는 없다.
그리고 도주님께서는 수10만 도인을 거느리시고 또 막대한 사업을 전개하시면서도 항상 도단의 임원들로 하여금 포덕과 교화에 소홀함이 없도록 독려하실 뿐 아니라 몸소 수도 공부에 정진하시며 겪으신 고초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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