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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6. 잠룡. 회룡도수(潛龍·廻龍 度數)
작성자 작성일 2012-01-01
파 일

潛龍·廻龍 度數
 
도기(道紀) 27년 을해(乙亥 : 1935)년부터 도단에 비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우선 완공되어 농토화한 안면도와 원산도의 간척지에 왜인의 마수가 뻗쳐온 것이다.

허가서류가 미비라느니 공사가 불법이라느니 하다가는 결국 불령선인(不逞鮮人 : 불평불만을 품고 복종하지 않는 조선사람) 집단의 반일(反日)운동이라는 트집을 잡아 이 간척지들을 수탈당하는 사건이 생겼다.
이로써 안면도 간척지는 왜인 회사인 마생(麻生)의, 원산도 간척지는 보령군(保寧郡)의 소유로 넘어가는 결과가 되었으나 단돈 한 푼의 보상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임원들의 울분에 찬 하소연에 도주님께서는,
“망국민(亡國民)의 억울함이 어찌 이뿐이랴? 모든 것이 도수니라. 그러나 이로써 조수와 토지를 조화시켜 해원하였으며 또 많은 빈민이 노임을 얻었고 소작이나마 경작지가 생겨서 구제되었으면 족할 뿐, 그 소유가 누구에게 돌아감을 탓하랴. 장차 오늘의 시범(示範)을 알게 되리라”하시고 임원들이 서두는 송사(訟事)를 중지시키셨다.
8월 추석치성 때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근엄하게 교시하셨다.


“모든 일에는 때의 도수가 있느니라.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이 바로 낙화도수와 잠룡(潛龍) 도수의 시작이니 나의 27년간 헛도수가 또한 지금이라, 나는 다시 입산(入山) 수도할 것이니 그대들도 각자 귀가(歸家)하여 내가 다시 찾을 때를 기다리라” 하셨으나 그래도 임원들은 그 뜻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어리둥절 하기만 했다.
12월에 조선총독이 전북지사 고원훈(高元勳)을 도주님께 보내어 친서를 전달하고 감언이설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에 동조할 것을 강요했다. 이에 대하여 도주님께서는,
“이런 일은 그대가 아니고 일본 왕이 직접 와서 말한다고 해도 안되는 일이니 총독에게 내말 그대로 전하라”하고 단호히 거절하셨다.


그러나 지사는 그후에 다시 와서 비상시국(非常時局)을 말하며 당국의 정책에 협조할 것을 재삼 간청했지만,
“나는 이미 도단을 해산하고 때를 기다리기로 결심했으니 다시는 도에 대한 일을 거론하지 말라”하고 전일보다 더욱 완강하게 거절하셨다. 지사는 결국 공문으로 그들이 말하는 ‘종교단체 해산령’을 전하고 무극도의 해산을 통고했다.


이해 그믐날 설치성을 전보다 더욱 성대히 준비하게 하시고 제석(除夕)배례를 올리는 임원들에게,
“도의 낙화도수와 나의 잠룡도수가 다달았다. 내가 지난 추석에도 말한 바와 같이 그대들은 각자 귀가하여 생업에 종사하며 부모처자를 봉솔(奉率)하고 내가 찾을 때를 기다리라. 잠룡은 물용(勿用)이나 현룡(見龍)을 기(期)하고 낙화는 비정(非情)이나 결실을 위함이니 결실전에 요동하면 화가 있으리라. 1년이 되거나 10년이 될지라도 나와 도를 믿고 기다리되 만약 지동지서(之東之西)하면 만나지 못하리니 각골 명심하라”하고 엄훈(嚴訓)하셨다.
명령을 마치시고 임원들의 얼굴을 일일이 굽어살피신 다음 치성을 집례하셨는데 예필(禮畢) 후에 영대의 촛불이 일제히 꺼지므로 다시 켜고 철상(撤床)하게 하셨다.


병자(丙子 : 1936)년 설날은 무극도의 임원 도인들에게는 참으로 암울한 날이었다. 아침 일찍 도주님께 세배를 드리려고 모두 모였으나 끝내 뵈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동은 누누이 말씀하신 ‘잠룡도수’의 참뜻을 그때서야 체인(體認)하는 듯 하였다. 그래서 장시간 논의한 끝에 얻은 결론은 모두 각자 귀가하기로 한 것이다.

도주님께서는 벌써 이날 새벽 치성 직후에 은밀히 시종 몇 사람만 거느리고 전주로 가셔서 공부설석(工夫設席)하고 두문불출하시며 도내외(道內外) 누구에게도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엄명하셨다.
지방의 도인들은 무극도가 해산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매일 수백명씩 도장으로 찾아와서 “무극도의 해산은 왜정의 탄압 때문이라”하며 울분을 토하다가 마침내는 그 앞잡이인 태인주재소와 정읍경찰서를 습격하자는 모의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감시의 눈을 부라리고 있던 경찰에게 탐지되어 무장경관 수십명이 도장에 들이닥쳐 도인들을 모두 축출하였다. 도주님 이하 전체 도인의 정성과 노력으로 이룩된 도장 건물도 몰수, 경매, 철거하는 만행을 왜경은 서슴없이 저질렀다.


도주님께서는 전주 대정정, 완산정에서 공부하시다가 3년만인 무인(戊寅 : 1938)년 봄에 마산 교방동(校坊洞)으로 옮기셨는데 공부처에는 누구의 출입도 엄금하시고 가족들의 왕래도 엄히 제한하셨다.
증산상제님의 유족(대모 권씨, 사모 정씨, 매씨 선돌부인, 따님 강순임)은 도주님께서 마동 상봉 이래 한 가족과 같이 부양하시더니 태인도장 영건 후에는 태인읍 태성리(도장에서 남쪽으로 약 1000m 거리)에 주택을 사서 살게 하시며 생계를 보조하셨다. 무극도 해산 후에는 혼자 남은 강순임을 전주시 노송동에서 살게 하시며 재정담당 김병팔을 시키셔서 생활비를 전달하게 하셨더니 1년 후에는 김병팔과 함께 경북 의성지방으로 가서 독자의 교단을 창설함으로써 도주님과의 인연을 끊었다.


도주님께서 다음해 가을에 회문리 고향집으로 옮기셔서 회룡재에서 두문불출하시며 공부를 계속하셨다.
이무렵 왜국의 폭정은 날로 혹독해져서 시국은 각박하고 인심은 흉흉하였다. 징병, 징용, 보국대, 양곡공출로 부터 심지어 가마니, 새끼, 송진, 놋그릇까지 수탈하고 저희 조상신을 숭배하는 신사참배를 강조하는 등 경제적 착취와 정신적 압박을 가하더니 마침내는 조상전래의 성씨까지 저희와 같이 두 자 성으로 갈게하는 발악적 만행을 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더구나 도주님 가족은 과거 만주로 망명하기 전에 항일운동한 사실과 비록 이미 해산은 되었지만 무극도가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종교였다는 사실에 따른 왜경의 요시찰(要視察) 대상인물로 지목되어 감시가 심하고 행동의 제약까지 받았다. 이때문에 숙부 서산공과 신산공은 몸을 피하여 만주 또는 일본으로 가서 장기간 유랑생활을 하기에 막심한 고초를 겪었다.


경진(庚辰 : 1940)년 가을 잠룡 5년만에 비로소 회룡도수의 천계(天啓)를 받드시고 무극도 당시의 임원 이용직(李龍稙)을 회문리로 부르셨다.
이때 도주님댁의 식솔(食率)은 10여명이었지만 생업에 종사하는 이는 시종(侍從) 반상문(潘相文) 혼자 뿐이고 약간의 농사를 지었으나 모두 공출로 빼앗기고 오직 대두박(大豆粕)등 잡곡배급으로 생활하며 거기에 왜경의 사상사찰로 행동까지 부자유한 그 궁핍·고난상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이런 속에서도 도주님께서는 회룡재에서 공부를 계속하셨는데 혹한에도 공부실에 불을 때지 못하게 하시고 항상 법좌(法坐)하여 법수(法水)그릇을 두 손에 받쳐들고 밤을 새워 공부하셨다. 법수가 넘쳐서 손에 고드름이 달리고 손가락은 동상으로 터져서 배접한 위에까지 피가 흘러도 동요하지 않으셨다.
신사(辛巳 : 1941)년 정초에는 회룡(廻龍)도수와 인덕(人德)도수를 말씀하시며 포덕(布德) 재개를 하명하셨다.
12월에 상설(霜雪)도수라고 하시며 15일간을 회룡재 뒷마당에 볏짚을 편 자리에서 철야로 공부하시는데 매일 밤 서리는 물론 눈이 내려 의관을 덮는 적설(積雪) 속에 묻히다시피 하여도 참고 완공(完工)하셨다.
임오(壬午 : 1942)년 봄에 도주님께서,
“나도 이제는 머지않아 새 옷을 갈아입게 될 것이다”하시며,
“이 도장을 ‘회문도장(會文道場)’으로 부르도록 하라”고 명하셨다.


계미(癸未 : 1943)년에 이르러서는 새로 찾아드는 도인(道人)이 수 100호로 늘어났다. 왜정의 소위 전시비상체제하(戰時非常制下)에서 그들의 감시를 피하여 숨어서 하는 포덕이라도 이정도였으니 만약 드러낸 포덕이었으면 이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기간에도 도주님께서는 도수에 따라 행동하시며 잠시도 쉬지 않고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시는데 그동안 많은 기행(奇行) 이적(異蹟)도 행하셨지만 일일이 기록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갑신(甲申 : 1944)년 어느날 도주님께서,
“내 나이 지천명(知天命 : 50)이며 득도한 지 27년이고 잠룡도수도 어언 9년인데 앞으로는 인덕(人德)도수의 법공부(法工夫)라야 할 것이다”하시고 포덕에 힘쓰게 하시며 공부를 계속하셨다.
9월  하순에 창원 천주산(天柱山)속에 초막을 치시고 백일공부에 들어가셨는데 이때 말씀하시기를,
“이는 창생의 해박(解縛)을 위한 해방도수의 연속이라”고 하시며 무한한 고행을 하셨다. 이때 이용직이 시봉(侍奉)하였는데 날씨가 얼마나 추웠던지 공부석 앞에 모셔 놓은 법수의 얼음이 솟아올라 수염의 고드름과 연결될 정도였으나 그래도 불을 때지 못하게 하시며 움직임 없이 공부에만 정려하셨다.


드디어 을유(乙酉 : 1945)년이 되었다. 설날 치성 후에 임원들에게 내리신 말씀을 오늘에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내가 천명을 받든<奉天命> 지가 올해로써 36년, 잠룡한 지도 10년이다. 이 잠룡·지각(知覺)도수의 고비를 넘겼으므로 나의도에 새 도수기운이 비치어 온다. 태중의 아이도 열 달이면 새 세상으로 나오고 잠(潛)도 회(廻)하면 현(見), 비(飛)하는 도리를 그대들이 알아야 한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보아라. 7석(七夕) 상봉(相逢)이 있으리라”하셨는데 그 당시에는 모두가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씀으로 들렸으나 8·15광복이 되고서야 그 깊은 뜻을 실감하였다.


2월 하순에 다시, “내가 지난 3년간 태극의 기동(機動)과 해박, 현룡(見龍)의 대도수로 3·8동방목운(東方木運)을 회선(廻旋)시켜......도운(道運)과 국운의 회룡도수를 성취코자 계속해온 공부의 마지막 백일공부에 들어간다”하시고 6월 초순까지 홀로 고행을 하시며 수도하시고,
“이번 도수에는......진묵(震默)과 이마두(Matteo Ricci)등 문명신들도 모두 소환하여 공사(公事)에 협력하게 하리니 그 신명들이 돌아올 때는 천지이변(天地異變)이 일어나리라” 하셨다.


이 도수공부에서 3복(三伏) 더위에 얼마나 신고하셨던지 옥체가 수척하여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하셨으며  몸을 가누지 못하시고 여러번 쓰러지기까지 하시므로 시종하던 이용직이 너무나 황공하여, “아무리 창생구제를 위하시는 일이라도 옥체를 보전하옵소서”하고 여쭈니,“이 고행을 내가 아니면 누가 하리요......내가 이렇게 신고하여도 천하창생을 다 살릴 수 없으니 한스러운 일이로다”하시며 공부를 계속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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