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진경

제목 태극도 - 태극진경 4장
1
옥황상제님께서 병자(丙子 : 도기 28, 단기 4269, 서기 1936)년 원조 치성 음복을 마치신 후에 가족과 임원들이 세배를 올리려고 도솔궁의 중궁에 모였으나 임어하지 않으시니라. 임원들은 이상하여 사방으로 찾으며 여러 시간을 숙고하고 논의하였으나 치성 전에 하명하신 "잠룡 도수"의 진의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끝내 뵙지 못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니라. 다시 상의한 결과 "각자 귀가하라." 하신 고명(誥命)을 상기함으로써 허탈한 심정을 억제하고 마침내 귀가하기로 결정하니라.
2
상제님께서는 이날 새벽 치성 직후에 은밀히 김병팔 등 시종 몇 사람만 거느리시고 전주로 행행하셔서 며칠간 대정동(大正洞) 여관에 유어하시다가 그 부근의 집을 얻어 설석하시고 공부하시더니 1개월 후 다시 완산동(完山洞)에 집을 얻어 가족 일부와 함께 이어하시니라. 또 그 뒷집을 얻어 설석하시어 두문불출하시며 공부하시는데 외인의 출입을 엄금하시며 가족들도 신분이 노출되지 않게 하시고, 도인에게는 물론 외부 사람 누구에게도 상제님의 행재는 극비에 붙이도록 엄명하시니라.
3
이때 지방도인들은 임원들을 통하여 "잠룡 도수"의 명령은 받들었으나 믿어지지 않는 일이므로, 직접 확인하고자 매일 수백 명씩 도장으로 찾아오니 임원들은 이들을 설득, 귀가시키기에 애를 쓰니라. 그중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임원들에게 항의하다가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도주님의 잠룡과 무극도의 해산은 왜정의 탄압으로 인함이라." 하며 왜를 타도하고자 수백 명이 떼를 지어 태인주재소와 정읍경찰서를 습격하기로 모의하니라. 이를 탐지한 왜경이 무장경관 수십 명을 도장에 주둔시켜 도중가족 이외의 출입을 금지하며 도인들의 동태를 엄밀하게 정탐하여 진압하니라.
4
그 후에 가족들은 왜경의 감시를 피하여 한 사람씩 전주로 합솔하였으며, 도장 건물은 왜정의 악법인 종교단체해산령에 의한 몰수 · 경매로 철거되니라. 이때 태인 도장 건물을 철거하려고 하니 도장 지붕에서 범의 울음소리가 여러 번 났으며 온 골짜기가 들먹였다는 소문이 떠도니라. 숭정부인께서는 3남매를 데리고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도장을 지키다가 건물이 완전 철거된 이해 9월에 전주로 합솔하시니라.
5
상제님께서는 당초에 증산 상제님의 유족을 황새마을에서 도인들로 하여금 살펴 드리게 하시더니, 태인 도장 영건 후에는 도장 근처에 주택을 매입하여 이주하게 하시고 생계를 보조하시니라. 다만, 강순임은 양덕진의 행패에 시달리므로 상제님께서 전주 노송동(老松洞)에 집을 매입하여 이주시키시고 계속 하사하시는 보조비로 생활하게 하시더니, 선정 대모 권씨와 선경부인 정씨께서 화선(化仙)하시고 무극도가 해산한 후에, 김병팔과 함께 경북 의성(義城)지방으로 옮겨 그곳의 도인들을 모아 새로운 교단을 세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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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축(丁丑 : 도기 29, 서기 1937)년 봄에 상제님께서 전주에서 공부를 계속하시니 김진생(金鎭生) 등이 시봉하니라. 가족들은 모두 회문리 옛집으로 이사하여 농사로 생활하게 하시니 정윤필(鄭潤弼) 등이 이사의 업무와 경비를 전담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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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戊寅 : 도기 30)년 봄에 상제님께서 마산 교방동(校坊洞)에 집을 사서 이어하시고 설석하셔서 공부하시니 이규창(李圭昶) 등이 시봉하니라. 공부처에는 전주에서와 같이 외인의 출입을 엄금하시고 가족들의 내왕도 제한하시니라.
8
기묘(己卯 : 도기 31, 서기 1939)년 6월 초3일 선덕 부인께서 회문리 옛집에서 화선하시니 향년이 59세시니라. 상제님께서는 평생을 창도사업에 헌신하신 부인의 공로를 회상하시고 비도(悲悼)하시며 몸소 초종상례(初終喪禮)를 주관하셨으나, 왜경의 횡포로 후하게 장례를 치를 수 없으셔서 인근 어령(於嶺)에 안장하시고 둘째 자제인 승래(升來)로 하여금 봉사(奉祀)하도록 지정하시니라.
9
이해 가을에 상제님께서 회문리 옛집으로 이어하셔서 회룡재(廻龍齋)에 설석하시고 두문불출하시며 공부하시니라. 시국은 왜의 폭정이 극도에 달하여 경제적 수탈과 정신적 압박이 극심하고, 심지어 민족 고유의 성명마저 개역(改易)하도록 강요하였으나 상제님께서 이를 끝까지 거부하시니 왜는 재산 소유권 등 자유와 인권을 박탈할 뿐만 아니라, 배급제로 한 식량 · 비료 등 생활 필수품에 이르기까지 관권(官權)을 악용한 강압을 가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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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왜경에서는 복우도장 가족이 과거에 항일독립운동에 활약한 사실과 상제님께서 무극도 도주이셨던 경력을 내세워 소위 사찰(査察) 대상으로 정하고, 일체의 행동을 감시 · 단속하므로 서산공과 신산공은 이를 감당할 수 없어 다시 왜국 또는 만주로 정처 없이 떠나시니라. 왜경에서는 또 상제님의 삭발을 강요하다가 불응하시므로 순사들을 회문도장에 침입시켜 강제로 삭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상제님께서 옆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하고, 도장을 상제님으로 오인하여 상투를 자르고자 강압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상제님의 상투는 끝내 자르지 못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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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이러한 괴로움 속에서도 회룡재에서 주공부(籌工夫) 등의 공부에만 전념하시더니, 가을 어느 날 잠시 과거를 회상하시며 비록 도수에 따른 잠룡기라 할지라도 벌써 4개성상(四個星霜)이 지나도록 대업을 수행하지 못하신 상념에 잠기시니라. 이때 구천 상제님께서 계시하시기를 "모든 것이 천기니 지각(智覺)으로 도난(道難)을 극복하고 오직 대도성취(大道成就)의 회룡운(廻龍運)을 기다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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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진(庚辰 : 도기 32)년 가을에 상제님께서 이용직(李龍稙)에게 친서를 쓰셔서 장남 준래(俊來)로 하여금 우송하게 하시니라. 용직은 예천(醴泉) 사람으로 조실부모하고 가세가 빈한한 데다 왼다리를 절며 고용살이로 전전하다가 도문에 들어온 후 지성으로 신봉하더니, 무극도의 해산이 원통하였으나 상제님의 하명을 명심불망(銘心不忘)하고 고향에서 머슴살이하며 때를 기다리니라. 이때 어서(御書)를 받들고 반가운 나머지 목놓아 울며 내용을 살피니 "네가 지우금(至于今) 나의 말을 명심하고 기다림이 가상하니 이 서신을 보는 대로 회문리로 찾아오라." 하셨으므로 회문리를 향하여 망배를 올린 다음, 당일로 출발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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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직은 상제님께서 제 마음을 헤아리시고 주소까지 아셔서 어서(御書)를 내리신 일이 신이하고 황송 · 감격하여 불편한 몸으로 며칠을 걸어 회문리에 당도하니라.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整齊)한 다음, 회룡재에 올라가 상제님께 배알하며 기쁨의 눈물을 그치지 못하니 상제님께서 반가이 맞아 위로하시며 "네가 나의 명을 잊지 않고 기다리기에 서찰을 보냈었노라. 그러나 너는 머슴살이에 매인 몸이니 내려가서 마치고 올라오되, 아직은 나의 거처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시니라. 용직은 며칠 후에 다시 돌아갔다가 10월에 3년간의 고용기한을 마치고 새경으로 받은 백미 석 섬을 매각하여 쓰지 않고 회룡재에 와서 성금으로 올리니 고사(固辭)하시다가 용직의 지극한 정성을 물리치지 못하시고 드디어 거두셨으며 용직은 이로부터 회룡재에서 시종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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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직이 살펴보니 상제님의 가족은 10여 명이나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반상문 혼자뿐인데, 그나마 왜의 압박이 극도에 달하여 농작물은 수확하면 전부 공출(供出)로 빼앗기고 식량은 잡곡과 대두박(大豆粕)이 배급될 뿐이며 왜경의 사찰이 심하여 행동이 자유롭지 못함은 물론,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어 수라상에도 진잎죽을 올릴 수밖에 없을 정도이므로 생활의 궁핍은 형언할 수 없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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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혹독한 추위에도 회룡재 공부실에 불을 때지 못하게 하시므로, 용직이 살피니 상제님께서 법좌하신 채 법수 두 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드시고 철야 공부하시니라. 상제님께서는 그 법수가 넘쳐 어수(御手)에 고드름이 달리고, 어지(御指)는 동상으로 터지셔서 배접하셨으나 그 겉에 피가 맺히셨으며, 발에도 얼음이 박혀 부으셨지만 괴로워하시거나 동요하지 않으시니라. 용직이 너무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참을 수 없어 영을 어기고 몰래 불을 때기 시작하니, "네가 내 몸을 걱정함은 가상하나 내가 이렇게 하여야만 천하사가 성취되리니 너는 나의 공사를 방해하지 말라." 하시며 엄히 책망하시므로 끝내 불을 때어 드리지 못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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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辛巳 : 도기 33)년 원조에 상제님께서 생활이 옹색하신 중에도 예년과 같이 명절 치성을 올리신 다음, 그동안 계속하신 "주도수(籌度數)"를 보시다가 용직에게 하명하시기를 "나의 도가 구천 상제님의 '인덕도수(人德度數)'를 마쳐 드린 다음, 잠룡한 지 벌써 6년에 접어들었으므로 이제는 나의 인덕도수인 '의관정제(衣冠整齊) 진시삼천지반(盡是三千之班)'의 회룡 도수가 다가오고 있으니 너는 지방으로 내려가서 다시 포덕에 힘쓰도록 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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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직은 즉시 지방으로 내려갔으나 시국이 너무 흉흉하여 누구에게도 심중의 말을 함부로 못 할 때이므로 과거의 도인에게만 연락하여 포덕하니라. 매월 월성(月誠)을 수봉(收捧)하여 상제님께 올라올 때는 양곡 운반을 엄금하는 왜경의 감시를 피하여 걸인으로 가장하고 치성에 쓰실 쌀과 전수를 올리니 상제님께서 "너의 불구가 나의 공사에 효용(效用)되어 대도성취(大道成就)에 이바지하는도다." 하시며 위로, 격려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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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이때까지 도를 잊지 않고 때를 기다리던 문경의 박내익(朴來益), 영주의 김명구(金命求), 김천의 김태만(金台萬) 등도 친서 또는 인편으로 소환하셔서 용직과 함께 포덕하도록 하명하시니 이로부터 도운이 다시 맹동(萌動)하니라. 그들이 지방에서 매월 회룡재에 내왕할 때는 왜경을 피하여 야간에 산길을 이용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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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4월 중순에 상제님께서 숭도부인과 준래를 무릉산 장춘사(武陵山 長春寺)에 보내셔서 백일공부를 하게 하시니라.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니 후원 대나무 숲 속 동 · 서 · 중앙의 3개처에 토단(土壇)을 설치하게 하시고 동쪽 단에는 숭도부인, 서쪽 단에는 숭정부인, 중앙 단에는 준래가 밤마다 자정에 단에 올라 법수를 모시고 3시간씩 법좌하여 진법주를 연송하며 백일공부를 하게 하시더니, 이와 같은 공부를 매년 1회씩 3년간 시키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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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중순에 상제님께서 "상설도수(霜雪度數)"라 하시며 회룡재 뒤뜰에 짚을 펴시고 공부설석하셔서 15일간을 철야하시니라. 이때 매일 밤 서리와 눈이 내려 의관을 덮었으며 파석(罷席) 전날 밤에는 백설이 더욱 많이 내려 옥체보다 높이 쌓였으나 미동도 아니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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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壬午 : 도기 24, 서기 1942)년 봄 어느 날 회룡재에 매월 올라오는 용직 등 도인들에게 하명하시기를 "그대들이 도를 믿는 것은 역시 나를 믿는 까닭이 아니냐? 그러므로 나도 이제는 머지않아 새 옷으로 갈아입으리니 그대들도 포덕에 더욱 힘쓸 것이며, 이 도장을 앞으로는 '회문도장(會文道場)'이라 부르도록 하라." 하시니라. 하명을 전해 받든 도인들은 하명의 깊은 뜻은 깨닫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사기충천하여 포덕에 더욱 진력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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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4월 월례상정시(月例上廷時)에 용직이 중산(中山)의 어느 도인이 진상하는 떡을 가지고 3일 만에 도장에 올라와 상제님께 올리니 떡이 변질되어 있으니라. 용직이 송구하여 몸 둘 바를 몰라 하니 상제님께서 "이 또한 도인의 성(誠)이어늘 변하였다고 버리지는 않으리니 안심하라." 하시고 숭도부인으로 하여금 술을 빚게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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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어느 날 상제님께서 "도갑신도수(逃甲神度數)를 본다." 하시며 황쾌섭(黃快燮) 등 도인 몇 사람을 도덕곡(道德谷)으로 보내셔서 고사를 지내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도갑신(逃甲神)은 천지신명계에 배속되지 못한 한을 품었으므로 독갑신(獨甲神)이 되었느니라.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독갑신의 호응(呼應)을 받지 못하여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를 입었으나 이제 내가 이 도수로써 독갑신을 해원시켜 안정하게 하리니 앞으로는 그 피해가 없으리라." 하시니라. 이때 일반사회에서와 달리 개고기를 고사에 쓰게 하시고 그 고기를 도인들과 나누어 진어하시니라.
24
계미(癸未 : 도기 35, 서기 1943)년에 이르러서는 은밀히 하는 포덕이라도 차츰 늘어나서 도가가 수백 호에 달하니라. 그러나 시국은 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지 7년이고, 소위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는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일으킨 지도 3년이 되며 전세가 불리할수록 왜의 폭정은 날로 심하여지니라. 소위 전시비상체제라는 구실 아래 우리 민족을 완전히 노예화하여 농작물의 공출, 수탈과 함께 금 · 은붙이와 유기 · 철물로부터 송진 · 갈피(葛皮)에 이르기까지 전쟁에 소요되는 물자라면 무엇이든지 수탈할 뿐 아니라, 청장년들을 지원병 · 징병 또는 징용(徵用)으로 전장이나 노역장에 몰아넣고, 여자들도 정신대(挺身隊)라는 명목으로 강제 징발함으로써 민심은 더욱 흉흉하니라. 이에 따라 왜의 발악적인 감시가 더욱 심하여 사상적으로 혐의를 받으면 생명이 위협되는 정세이므로 포덕 · 교화에 지장이 막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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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12월 20일에 장남 준래를 칠원 무기(舞沂)의 상주 주씨(尙州周氏) 영석(永錫)의 장녀 복순(福順)과 성혼시키시니라. 이때 자제분들의 도호(道號)를 하사하시니 장남 준래는 청봉(靑峰), 차남 승래는 청암(靑岩), 삼남 영래(永來)는 청구(靑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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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甲申 : 도기 36, 서기 1944)년 가을 어느 날 아침에 숭도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나이 이제 지천명(知天命)이며 득도한 지는 만 27년이라. 그동안 구천 상제님의 도수공부에 나의 성과 열을 다하였으며 잠거(潛居)한 지도 어느덧 9년이니 머지않아 정기(旌旗)를 일으킬 기틀이 열리리라. 이제 '이윤(伊尹)의 50에 시지사십구년지비(始知四十九年之非)'와 '홍성문(洪成文)의 27년간 허공부'의 도수를 마침이니 앞으로는 인덕도수의 법공부(法工夫)라야 함을 새삼 체감하는 바요."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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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하순에 상제님께서 창원 천주산(天株山) 산중에 의막을 치시고 설석하셔서 백일공부에 임하시며 "이는 창생해박(蒼生解縛)을 위하여 시행하는 '해방도수(解放度數)' 공부의 연속이니라." 하시니라. 이때 시종으로 반상문만을 거느리시고 혹한에도 화기를 금하시며 겪으신 고초는 형언할 수 없으시니, 법수의 얼음이 솟아 용수(龍鬚)의 고드름과 연결될 정도였으나 미동도 아니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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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乙酉 : 도기 37, 단기 4278, 서기 1945)년 원조에 상제님께서 회룡재에서 명절 치성을 올리신 후, 각 지방에서 올라온 도인 중에서 이용직 · 김명구 · 박내익 · 김태만 등을 지방임원으로 임명하시니라. 임원들에게 하교하시기를 "내가 봉천명한 지는 올해로써 만 36년이며 잠룡한 지는 10년째가 되었도다. 그 잠룡 도수 9년간에 그대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며, 냄새조차 풍기지 못하는 고통을 참고 견디어 왔음을 치하 · 위로하느니, 이 실로 '잠룡 · 지각도수(知覺度數)'였느니라. 이제야 큰 도수는 고비를 넘겼으므로 새해에는 나도 정말 새 옷을 바꾸어 입으리니 태아도 10삭이면 출생하고, 잠(潛)도 회(廻)하면 현(見)하고 비(飛)하는 법이라, 나의 도는 이제 이름만 지으면 되느니라. 그대들은 안심하고 포덕에 힘쓰되 전도인에게 '새 도수기운(度數機運)이 가까워 오니 참고 기다리라'라고 전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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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도인들이 나에게 올리는 성금은 나 개인의 용돈이 아님을 명심하라. 이는 내가 천명을 받들어 대도를 현창(顯彰)하고 삼계를 광구하는 공사의 신성한 경용(經用)이며, 천지공정(天地公庭)의 공금(公金)인 동시에 도인 각자의 성경신을 표상(表上)함이며 후천복록(後天福祿)을 축적함이므로 월성금(月誠金)은 삼일성(三日誠)이 되어야 하느니라." 하시고 정기월성금(定期月誠金)과 표성금((表誠金)제도"를 시행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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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하순에 지방임원들이 올라와서 상제님께 배알하니 하교하시기를 "내가 지난 3년간 태극의 기동(機動)과 해박(解縛) · 현룡(見龍)의 대도수로 3 · 8동방목운(三八東方木運)을 회선(廻旋)시켜 천하창생을 구제할 도운과 국운의 회룡 도수를 성취하고자 계속하여 온 공부의 마지막 백일공부에 들어가노라. 이는 회룡재 공부의 종결이며 대도회룡(大道廻龍)의 일대전기(一大轉機)니, 그대들도 도장에 올라오나 지방에 내려가나 더욱 근신하고 각자의 본분을 다하라." 하시고 공부에 들어가셔서 6월 초순까지 두문불출, 독수고행(獨修苦行)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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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말씀하시기를 "이번 도수에는 서양에 가서 역사(役事) 중인 진묵과 이마두 등 문명신들도 모두 소환하여 나의 공사에 진력하게 하리니 그 신명들이 돌아올 때는 천지이변(天地異變)이 일어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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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부를 시작하실 때에 지방임원들에게 하명하셔서 각 지방마다 성심 있는 도인을 선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매일 축시 기도에는 법수 열두 그릇을 올리고, 뉘와 싸라기를 가려낸 정미로 메를 지어 올리게 하시니라. 공부를 마치신 후에는 법수를 "낙반사유(落盤四乳)"라 하시며 네 그릇으로 올리도록 변경하시더니 만 5년 후에 한 그릇으로 고정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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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수공부 중에 상제님께서는 공부실에서 법좌 · 송주하시던 평소의 공부방법과 달리, 양손에 법수를 각각 드시고 부동자세로 입어(立御)하셔서 밤낮없이 송주하시니 그 신고가 더욱 심하시니라. 오뉴월 불볕더위에 땀으로 어의가 젖으셔서 하루에도 2, 3차례씩 갈아입으시고 발이 부으셔서 거동이 어려우셨으며 때로는 쓰러지기까지 하시니라. 하루는 용직이 황공하여 "아무리 창생구제를 위하시는 일이라도 옥체를 보전하옵소서." 하고 사뢰니 "이 고행을 내가 아니면 누가 하리오?" 하시고 또 "내가 이렇게 신고하여도 천하창생을 모두 살릴 수는 없으니 한스러운 일이로다." 하고 한탄하시며 공부를 계속하시니 옥체가 수척하셔서 피골(皮骨)이 상접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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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상제님께서 청봉을 보내셔서 밭에서 상문을 도와 김을 매는 용직을 부르시니라. 이때 용직이 조금 남은 일을 끝내고 올라가니 크게 꾸짖으시며 "네가 이 집에 농사하러 왔느냐? 옛사람은 '식재구즉토지(食在口則吐之)'라 하였는데 하물며 네가 즉시 오지 않고 지체할 수 있느냐? 내 공사의 도수에는 푼각을 다투느니 일분 일초의 차착에 천하창생의 사활이 달려 있음을 더욱 명심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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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4일 증산 상제님 화천일 치성을 성대히 올리신 후에 지방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 "중대사가 있으니 지방에 내려가지 말고 도장에 머무르며 송주공부를 하라. 그대들이 '도수'라는 말은 많이 들었으나 실지로 보지는 못하였으니 이번에는 직접 참여하고 목격하여야 하느니라." 하시니라. 임원들은 하명대로 봉행하면서도 무슨 일인지 궁금하였으며 전 임원이 도장에 함께 묵으면서 여러 날 공부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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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임원들이 지난 일을 회상하니 상제님께서 봉천명 이후 27년간의 고행은 물론, 병자(丙子 : 도기 28, 서기 1936)년에 무극도를 해산하시고 잠룡하신 이래 10년간 하루도 쉬지 않으시는 도수공부에서 겪으신 고초는 형언할 수도 없거니와, 그동안 왜정의 횡포로 겪으신 고경(苦境)이 너무나 혹심하심에 통탄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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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이러한 정황에서도 증산 상제님의 강세 · 화천일을 비롯하여 각종 명절과 절후일 등의 치성을 한 번도 거르지 않으시니라. 치성에는 반드시 친히 양조하신 청주(淸酒)로써 헌작(獻酌)하시기 위하여 시루 · 용수 등 기구와 누룩 등 자료를 항상 예비하심에 있어, 끊임없이 왜경의 단속 · 수사를 당하셨으나 상제님께서는 그때마다 미리 아시고 누룩 같은 단속대상 물품을 텃밭에 그대로 내어놓게 하셨지만 한 번도 발각되지 않으신 신이함에 임원들은 항상 감복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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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3일 밤에 임원들이 평일과 같이 회룡재로 올라가 혼정문후(昏定問候)를 올리니 상제님께서 준엄하신 가운데 자애롭게 말씀하시기를 "내 오늘은 그대들에게 태극의 진리를 도상(圖象)으로 설명하려 하노라. 태극은 오도(吾道)의 연원이며 또 우주 전체의 생성 · 발전하는 대원리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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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임원들에게 흰 비단을 주셔서 기를 만들게 하시니 너비는 두 폭을 봉합(縫合)함이고, 길이는 한 폭의 세 배니라. 이를 방에 펴시고 임원들을 시좌(侍坐)시키신 다음, 친히 필묵과 연료로 기 중앙에 원형인 청홍(靑紅)의 태극과 사방사유(四方四維)에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의 팔괘를 정성들여 그리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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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완성되자 다음과 같이 하교하시니라. "이것이 태극도(太極圖)니 중앙의 원은 무극이고 홍인 양과 청인 음은 태극의 표징(表徵)이니라. 이를 기로 하면 태극기가 되니, 곧 오도의 도기(道旗)니라. 이 기는 주역에 이른바 '역유태극(易有太極)하여 시생양의(是生兩儀)하고 양의(兩儀) 생사상(生四象)하고 사상이 생팔괘(生八卦)라' 하는 그대로를 도형화함이니라. 이 도상은 이 나라에서 오랜 옛날로부터 음양사상 또는 상제신앙(上帝信仰)과 함께 전래하더니 구한국에서는 이를 국기로 하였느니라. 지금은 왜가 이것을 금기하고 있지마는 만유군생(萬有群生)의 근본 원리가 바로 이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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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진(辰)시경에 상제님께서 후원 대밭에서 가장 큰 대나무를 베어 21척으로 자른 깃대에 친히 그리신 태극의 기폭을 달게 하셔서, 그 깃대를 숭도부인으로 하여금 회룡재 뒤뜰에 세워 혼자 붙들게 하시고, 기를 향하여 법좌하셔서 태을주를 연송하시며 공부하시므로 일동도 따르니라. 이때 동방에서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이 요사(妖邪)하여 부인 혼자의 힘으로는 깃대를 가눌 수 없어 쓰러지려 하시니라. 임원들이 부인을 부축하려 하니, 상제님께서 금하시며 "이는 동방의 한 사기(邪氣)가 하는 방해이나 음양합덕(陰陽合德)의 태극원리(太極原理), 정음정양(正陰正陽)의 기동이 도수에 이르렀으니 어려워도 혼자서 하여야 하고 남의 힘을 빌리지 않도록 함이 옳으니라." 하시므로 부인께서는 힘에 겨우셔서 온몸이 땀에 젖으시니라. 잠시 후에 상제님께서 동방으로 손을 올리시니 바람이 멎었으며 오(午)시경까지 공부를 계속하시니라.
42
이와 같이 하시기를 3일째 되던 날은 상제님께서 큰소리로 "태극이 기동하니 만물이 자시자생(資始資生)이로다." 하시고 조용히 독백하시기를 "인(仁)아 네가 이제 태극 앞에 고개 숙였으니 네 이름자의 덕으로 명은 유지되리라." 하시니라.
43
이어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 "이 기를 동구 밖에 세우도록 하라." 하시니라. 임원들이 어명(御命)임에도 내심 시국의 위험을 생각하여 모두 주저하므로 "태만이 자네는 그만한 용력이 있지 않느냐?" 하시니 태만이 용기를 얻어 기를 들고 뛰어가서 동구 밖 정자나무에 기대어 세워 놓고 돌아오니라. 이때 임원들은 매일 명령을 봉행하면서도 시국이 극히 금기(禁忌)하는 태극기를 내세우신 일에 모골이 송연하여 좌불안석(坐不安度)으로 지내니라.
44
5일째 되는 초8일, 양력 8월 15일 새벽에 상제님께서 새 의관을 정제(整齊)하시자, 처음 보는 동자가 회룡재 문전에 부복하고 상제님께 상고하기를 "왜왕(倭王)이 간밤에 무조건 항복하였나이다." 하였으나 상제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않으시는데 동자는 인홀불견(因忽不見)하니라. 임원들이 이상히 생각하여 상제님께 여쭈니 "그는 신동(神童)이니라." 하시고 더 말씀이 없으시더니, 아침에는 태극기를 옮겨 회룡재 앞에 세우게 하시고 공부를 계속하시니라.
45
이날 미(未)시경에 회문리 이장 황천수(黃千壽)가 와서 상제님께 고하기를 "오늘 정오에 왜왕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고 조선은 광복이 된다 하나이다." 하매 "이것이 바로 '해방도수'니라. 그러나 태극의 기동이 합덕(合德) 조화(調化)하여야 하거늘···.” 하시며 "너희는 모두 경거망동을 삼가라." 하시니라.
46
이장이 돌아간 후에 상제님께서 임원들에게 하교하시기를 "증산 상제님께서 '무극대운도수(无極大運度數)' 와 '27년 허도수'를 짜시며 '왜인을 임시 일꾼으로 내세우리라.' 하시고, '일시 저들의 영유는 될지언정 영원히 영유되지는 않게 하리라.' 하심과 '저들에게 일시 천하통일지기(天下統一之氣)와 일월대명지기(日月大明之氣)를 붙여 주어 역사를 잘 시키리라.' 하시며, '저희는 너희 일꾼이 되어 일은 분명하게 잘할 것이나 갈 때에는 품삯도 못 받고 빈손으로 돌아가리니, 말대접이나 후하게 하라.' 하심이 모두 오늘의 일을 두고 이르심이니라." 하시니라.
47
또 "나만큼 선대로부터 왜인을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讐)로 해야 할 집안의 사람도 없으나 만사는 천리의 도수로써 하여야 하느니라. 그동안 무극의 표징인 왜기가 이 강토를 덮었으나 이제는 태극도(太極圖)의 국기가 휘날리리니 이 곧 태극의 기동이니라. 왜가 무극대운의 일을 도와주었으므로 내가 무극대도로 27년의 '허령도수(虛靈度數)'를 마쳤으며 그 후 10년간의 '잠룡 도수 · 지각도수' 역시 마쳤느니라." 하시니라.
48
"구천 상제님의 일은 무극대운이요, 나의 일은 태극대도(太極大道)이므로 오도가 지금까지는 무극대운의 '기초동량도수(基礎棟樑度數)'였으나 금후로는 태극의 '기동도수(機動度數)'니라. 그러므로 증산 상제님과 나는 '무극과 태극의 관계'며 '증정지간(甑鼎之間)'이니 도로써 일체(一體)니라." 하시니라.
49
"내가 왜화(倭禍)로 망명하였으나 중도에서 봉천명을 하였으므로 망명지의 성도(省都) 심양(瀋陽)이 봉천(奉天)으로 개명됨이 어찌 우연이며 인위(人爲)였으랴? 또 과거의 무극도는 왜로 인하여 해산하였으나 그 기틀로 증산 상제님께서 인덕도수에 따라 구천상제위에 임어하셨느니라. 나는 이제 잠룡 · 회룡의 도수를 거쳐 진주(眞主)를 잡아 태극도주가 되었음을 고(誥)하노라. 그러나 오도의 도명이 태극도임은 아직 일반에게 공표하지 말라." 하시니라.
50
"내가 이 도수에 따라 허공부 끝에 잠룡과 회룡을 거쳐 최종 백일공부로써 삼계의 해방도수를 보아 태을문(太乙門)을 여는 대공사를 이루었느니라.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오직 천기요, 천운임을 그대들은 명심하라. 그대들을 체류시킨 뜻을 이제 알 터이며 도수의 실지를 목격하였으니 지방으로 내려가서 나의 이 뜻으로 포덕과 교화에 더욱 분발하여 태극의 도리를 사방사유에 선양(宣揚)하라." 하시니라.
51
이튿날 아침에 퇴배를 올리는 임원들에게 다시 하명하시기를 "그대들이 내려가면 전국 방방곡곡에 중론이 백화(百花)처럼 남발하고 사람들의 정신이 들떠 있을 것이나 현혹되어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말고 안심 · 안신으로 경천 · 수도하여 도인의 본분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 하시니라.
52
임원들이 지방으로 내려가니 과연 해방의 환희 속에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부르는 군중이 물결을 이루어 열광함이 마치 백화남발(百花濫發)의 형상인데, 오랫동안의 압박에서 풀리어 마음이 들떠 있었으나 도인들은 상제님의 훈교를 봉행하여 안심 안신(安心安身)의 본분을 지키니라.
53
이해 추석 치성 후에 하명하시기를 "천하대세는 오늘 이 일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삼계가 모두 태극의 원리로 음양이 기동하리니 근역강산(槿域江山)이 그 중심핵(中心核)이 되느니라. 그러나 좋은 일에는 마가 많아 단절과 분열이 점점 더 심할 조짐도 있으니, 도인들에게 합덕과 조화로 잘 교화하여 좋은 날을 보고 살도록 인도하라." 하시니라.
54
하루는 상제님께서 임원들에게 훈회하시기를 "도인으로서 자기수행의 근본요체는 무자기(無自欺)니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말아야 하느니라." 하시니라.
55
상제님께서 치성에 쓰시는 전수는 비록 남은 부분이라도 치성 전에 절대로 먹지 못하게 하시고 요리할 때는 간이나 양념의 맛도 못 보게 하시니라. 이해 12월 정산상제님 강세일 치성에 돼지를 잡아 쓰게 하셨는데, 태만이 돼지 신낭(腎囊)은 전수가 아니라 여기고 치성 전에 혼자서 구워 먹었더니 갑자기 복통이 나서 사경에 이르니라. 상제님께서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비록 무심코 한 일이라도 죄에는 벌이 있느니 참회하고 사죄하라." 하시므로 태만이 존전에 부복하고 고두사죄(叩頭謝罪)하며 참회하니 이내 나으니라.
56
치성 후에 상제님께서 임원들에게 하교하시기를 "이제 해방도수로 창생을 자유 · 자활하게 하였으니, 그로써 천하에 독립국가가 무리지어 일어나고 도와 교도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무더기로 생겨나리라. 그중에도 이 땅에는 각양각색의 교와 종(宗)이 난립할 것이니 이것이 증산 상제님께서 '초장봉기지세(楚將蜂起之勢)를 이루리라.' 하시고 '난법이 난 후에 진법이 나리라.' 하신 훈교의 응험(應驗)이니라. 그러나 진주의 진법은 나의 것이니 그대들은 오직 위아(爲我)의 수도와 위타(爲他)의 교화에 힘쓰라. 이 둘은 둘이 아니니 또한 합덕 · 조화의 원리니라." 하시니라.
57
또 하교하시기를 "조화는 신과 인간의 최귀요체(最貴要諦)요, 합덕은 음양의 최대원리(最大原理)니라. 비도(非道)와 사법(邪法)에는 조(調)도 화(化)도 없고, 합(合)도 덕(德)도 없으니 오직 정도와 진법이 오도니라." 하시니라.
58
병술(丙戌 : 도기 38, 단기 4279, 서기 1946)년 원조 치성 후에 상제님께서 세배를 받으시고 훈교하시기를 "기유(己酉 : 도기 원)년 봉천명시에 구천 상제님께서 나에게 광구 천하의 대임(大任)을 맡기시고 인신의 고초를 말씀하시더니 이제 27년간의 허령도수와 10년간의 잠룡 · 지각도수의 길고 험한 고난을 감내하고 초월 · 극복하였도다. 이에서 더 기쁜 일이 있을쏘냐? 오직 천명과 천운에 감사할 뿐이며 그대들의 노고 또한 치하하지 않을 수 없노라." 하시니라.
59
이날 가족과 임원들을 부르시고 동네 사람들을 청하셔서 척사대회(擲柶大會)를 개최하시고 함께 담소하시며 특이한 행마법(行馬法)을 하교하시니라. 그 행마법은 말을 서로 잡지 않고 양편이 끗수대로 나아가되 참먹이(出口)에서는 반드시 거기에 닿는 도수에 맞아야 나갈 수 있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상생원리(相生原理)에 맞는 척사행마법이니라. 상생은 서로 잘 살도록 하는 법이며 더욱이 남을 잘되게 하는 법이니 공생공존(共生共存)이 합덕이요, 공영공화(共榮共華)가 조화니라." 하시니라.
60
이달 28일에 김명구가 다른 지방임원들과 함께 임지로 출발하려고 퇴배를 드리고자 존전(尊前)에 올라가니 엄병윤(嚴炳允)의 소식을 하문하시므로 "그는 하명하신 진법의 주문이 아닌 잡방(雜方)으로 공부하나이다." 하고 상고하니 "너는 지방에 내려가서 즉시 병윤에게 가서 '사장(師丈) 모르는 차제도법(次第道法)은 문남룡(文南龍)의 공부라'는 말만 전하라." 하시니라. 명구가 봉명하고 예천으로 가서 병윤에게 그대로 전하였으나 그는 그 말을 들은 체도 아니하더니, 그 수년 후에 신도균(申道均) · 정기택(鄭基澤) 등과 작당하여 해도(害道)하다가 마침내 비명횡사하니라.
61
상제님께서 배신자의 일에 관하여 하교하시기를 "맹인은 꽃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농인(聾人)은 삼현육각(三絃六角)이 울려도 듣지 못하듯 도안(道眼) · 도이(道耳)가 열리지 않은 사람은 대도의 진주와 진법의 진경이 곁에 있어도 모르느니라. 그뿐 아니라, 도리어 비방 반역하느니라. 그러므로 신체의 불구보다 도의 불구자는 실로 만고처량한 하류군생(下類群生)이니라." 하시니라.
62
또 하교하시기를 "무릇 정신생활이나 현실생활의 용(用)에는 공(攻)이 있고 수(守)가 있느니 사(邪)와 비(非)는 맹공(猛攻)하고, 정(正)과 진(眞)은 고수(固守)하되 이러한 도심의 용은 목숨을 도(賭)하는 정심(正心) · 일심(一心)이 있어야 하느니라." 하시느라.
63
이어 훈회하시기를 "도인으로서 대인수행(對人修行)의 근본요체는 언덕(言德)과 해원이니 언덕을 잘 가져야 하며, 척을 짓지 말고 있는 척도 풀어야 하느니라." 하시니라.
64
이해 6월 한더위가 심한 어느 날 이용직 김명구 등 임원들이 회룡재에서 시좌하였을 때,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오늘은 풍운조화를 보여주리라." 하시자 청천백일에 홀연히 광풍이 일어나고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 암흑천지를 이루면서 소나기가 쏟아지니라. 상제님께서 도장 안채 지붕을 가리키시며 "저기를 보라." 하시므로 임원들이 바라보니 세차게 쏟아지던 소나기가 그치고 때아닌 흰 눈으로 변하여 눈보라가 휘날리는데 다른 곳에는 눈이 쌓였으나 그 지붕에는 쌓이지 않아 모두 신이하게 생각하니라. 다시 "그만 그쳐라." 하시니 날씨가 청명하여지니라.
65
또 어느 날은 임원들에게 "채소밭에 나가 살펴보라." 하시므로 도장 앞 밭에 가 보니 예전에 없던 복숭아나무 싹이 돋아나서 삽시간에 2, 3척가량 자라나 그 가지에 꽃이 피었다 지고 소담스러운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리니라. 돌아와서 상고하니 따오게 하셔서 나누어 진어하시고 "다시 나가 보라." 하시므로 가 보니 사라져 없으니라. 돌아와서 본대로 상고하니 미소를 띠시며 "너희는 이 일을 이상히 생각하지 말라. 풍운조화도 범인의 일은 아니나 수도인에게는 오히려 해가 되기 쉬우니 이런 일에 미혹(迷惑)하거나 몰두하지 말라." 하시니라.
66
이해 추석에 용직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를 바둑으로 비유하면 첫 점과 같으니라." 하시고 이병두(李炳斗)에게 "용직 명구 태만은 모두 증산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탕자(蕩子)의 도인과 같으니라." 하시니라. 이때 병두는 상제님께서 자기를 빼놓고 말씀하심에 불평하는 마음을 품으니라.
67
9월 치성 후에 임원들에게 제갈량과 황발부인(黃髮夫人)의 고사(故事)와 홍성문의 회문산 27년간 허공부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이제는 허령 지각시대가 지나고 신명시대가 당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68
상제님께서 하교하시기를 "한패공(漢沛公)의 성공은 신모야곡(神母夜哭)에 있고, 한광무(漢光武)의 성공은 적복부(赤伏符)에 있으며, 나의 성공은 오강록(烏江錄)에 있느니라." 하시니라.
69
12월 초4일 상제님 강세일에 축하상을 받으시고 임원들이 차례로 축배를 올리니 하교하시기를 "그대들이 나에게 잔을 올림은 못난 사람은 잘나도록, 모르는 사람은 알도록,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되도록, 병신은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여 달라는 축수(祝手)도 되지마는 그보다도 도운융흥(道運隆興)을 기원하는 잔이라야 도미(道味)가 있느니라." 하시니라.
70
정해(丁亥 : 도기 39, 서기 1947)년 원조에 상제님께서 임원들의 세배를 받으시고 하교하시기를 "이제는 '12윤회도수(十二輪廻度數)'를 마쳤으므로 대운대사가 도래(到來)하리니 대도의 성취를 빌어야 하리라." 하시고 다음의 한시 한 구절을 읊으시며 잘 외워 두라 하시니라. 一幅宇宙余若何 雨露不二永世定 일폭우주여약하 우로불이영세정
71
또 말씀하시기를 "전설에 '한패공은 융준용안(隆準龍眼)이요, 좌고(左股)에 유칠십이흑자(有七十二黑字)라' 하였으나 융준용안은 불가신(不可信)이고, 좌고에 유72흑자는 사실이니 이로 인하여 초패왕을 이기고 한나라를 세웠다 하느니라. 그대들이 도를 믿음은 나를 믿음이니 나에게도 그와 같은 증표가 있음을 보고 싶어 하리라. 이제 보이리니 분명히 보고 믿되, 이 또한 천기니 함부로 누설하지 말라." 하시며 좌우고(左右股)를 걷어 보이시니 과연 3적자와 72적자가 완연하므로 임원들은 마음속 깊이 감복하니라.
72
이때 상제님께서 이병두에게 우고의 3적자를 가리키시며 하문하시기를 "너는 이것을 어떤 표상으로 아느냐?" 하시므로 "천지인 삼재(三才)의 표상으로 아나이다." 하니 "옳게 보았느니라. 이를 삼태성(三台星)으로 알았으면 잘못이니라." 하시니라.
73
이해 2월 득도일 치성 후에 하교하시기를 "부 도야자(夫 道也者)는 천소명이 인이행지자야(天所命而 人以行之者也)이며, 앙지미고(仰之彌高)에 찬지미견(鑽之彌堅)하고 첨지재전(瞻之在前)에 홀연재후자야(忽然在後者也)이니, 누구라도 도를 눈으로 보고 믿지는 못할 것이요, 다만 진법도리를 깨달아 믿는 것이니라. 소경이 꽃을 보지는 못하여도 향기를 맡고 알듯 도는 보는 것이 아니라, 심공(心工)으로써 깨닫는 것이므로 심불재도(心不在道)라, 도재심공(道在心工)이니라." 하시니라.
74
또 "부모를 일찍 여의어서 보지 못하였다고 제 부모를 없다 하지 못하고, 국가 민족의 혜택이 없는 것 같아도 버리지 못하듯이, 도를 보지 못하여도 태극의 진리 속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하며, 신앙 수도의 영험이 당장에 없다고 버릴 수 없음이 어불리수(魚不離水)와 같으니라." 하시니라.
75
이어 훈회하시기를 "도인으로서 대인수행의 지상과제(至上課題)는 보은과 적덕(積德)이니 은혜를 저버리지 말아야 하며 남을 잘되게 하여야 하느니라." 하시니라.
76
또 "업은 아이 3년 찾는다는 속담이 있느니 도인들은 이 말을 명심하라. 우주의 대도인 태극의 진리가 멀리 있는 것으로 알기 쉬우나, 사람의 일상생활 가운데 함께 있으니, 업고 있고 안고 있으며 함께 숨쉬고 있는 것이 막비도(莫非道)니라." 하시니라.
77
3월 하순에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 "그대들이 지방으로 내려가거든 나의 적합한 공부처를 물색하라." 하시므로 4월 하순에 이용직이 문경 산북면 전두리 공덕산(功德山)의 대승사(大乘寺)에 가 보고 그곳이 합당할 듯하다고 사뢰니라. 5월 하순경 상제님께서 시종 몇 사람을 거느리시고 기차로 점촌역에 행행하시니, 산북면장 황수연(黃壽淵)과 부면장 박순석(朴順錫)이 그 지방의 채형식(蔡炯植) 등 많은 도인과 함께 역에서 배영(拜迎)하고 수연이 마필(馬匹)을 올리므로 형식이 말을 몰아 대승사(大乘寺)로 모시니라.
78
중도에서 날이 너무 더워 도인들이 땀을 흘리는데 상제님께서 "심한 더위로 그대들의 노고가 자심하도다." 하고 말씀하시니, 갑자기 구름이 일어 햇볕을 가리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일행은 더위를 식힐 수 있으니라. 대승사에 거의 임어하신 때는 날이 저물고 구름이 하늘을 가려 길이 어두우므로 상제님께서 "그대들의 가는 길이 너무 어둡지 않으냐?" 하시니, 구름이 삽시간에 남북으로 흩어지며 길이 밝아져서 쉽게 대승사에 임어하시니라.
79
상제님께서 며칠간 수도하실 방을 수연과 순석에게 얻게 하셨으나 주지가 불응하므로 부득이 그날 밤만 절에서 밤을 새워 공부하시니라. 용직이 "황송하옵게도 천하창생을 구제하시기 위하여 도주님께서 먼 길을 오셔서 공부하시려는데 일개 주지가 감히 거절할 수 있느냐?" 하며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눈물을 머금으니라. 상제님께서 아시고 "너무 염려하지 말라. 내가 한 번만 지나가도 도수는 볼 수 있으며 하룻밤 공부로도 내가 할 일을 마쳤으면 되었느니라. 다만, 대승사의 일이 걱정일 따름이나 그대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라." 하시며 위안하시니라. 그 후에 대승사가 화재로 전부 소실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용직이 직접 가서 확인한 다음, 상정하여 상제님께 아뢰니 "당초에 너희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하지 않았느냐?" 하시니라.
80
다음날 순석이 예약하여 놓은 그 면 김룡리 운달산(雲達山) 김룡사(金龍寺)로 이어하셔서 법당에 설석하시고 며칠간을 공부하신 다음, 절 뒤 상봉의 화장암(華藏庵)에서 "대장부 대장부도수(大丈夫 大丈婦度數)"와 "천지일월 음양도수(天地日月 陰陽度數)"로 백일공부를 하시니라.
81
8월 말경 어느 날 상제님께서 "머루를 구하여 오라." 하시므로 시종 윤점출(尹占出)이 온 산을 종일 찾아 헤매어도 머루가 있을 시기가 아니어서 찾지 못하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깊은 산 높은 나무 위에 걸린 덩굴에서 두어 되 가량의 머루를 따서 올리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의 정성이 지극하여 때 아닌 머루를 얻었도다. 어찌 머루뿐이랴! 성경신을 다하면 천하사도 이루리라." 하시니라.
82
상제님께서 김룡사 공부를 마치시고 하산하셔서 그면 약석리 약산동(藥山洞) 박순석의 집에 20여 일간 행재하시며 공부하시니라. 이때 수라 시봉은 순석의 처가 담당하였는데 행행 전날 밤 꿈에 한 신인(神人)이 현몽하여 찹쌀 한 말과 좁쌀 서말을 주면서 "이 쌀로 하느님의 수라를 지어 올리라." 한 일이 있었으며, 또 승안(承顔)을 모시러 매일 수십 명씩 모여드는 지방도인들을 접대하는데 얼마 안 되는 채소밭의 채소를 아침저녁으로 뜯어내어도 이내 자라나서 찬거리에 넉넉하므로 상제님의 덕화라 생각되어 더욱 공경하여 받드니라.
83
이때 상제님께 수종한 이병두가 존전에서 무엄불손(無嚴不遜)하므로 이를 본 순석의 아들 중하(重夏)가 꾸짖으려 하니 상제님께서 그 심중을 미리 아시고 타이르시기를 "그대로 두라. 병두가 도를 믿으러 온 줄 아느냐? 도주 행세를 견습하러 왔느니라. 앞으로도 병두 같은 자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리니 탓하여 무엇하랴?" 하시니라. 몇 년 뒤에 병두는 물러가서 관운장의 후신이라 하며 금강교주(金剛敎主)를 자처하더니 마침내 비명에 죽으니라.
84
이 무렵 각 지방 임원과 도인들은 순석의 집으로 와서 봉교하게 하시더니, 하루는 임원들에게 옛시를 외워 주시며 "잘 기억하여 두라, 후일 알 일이 있으리라. 하시니 이러하였으며, 10월 말경에 상제님께서 다시 회문도장으로 환어하셔서 회룡재에서 공부를 계속하시며 임원들만 내왕하게 하시니라. 耳目聰明男子身 洪鈞賦與不爲貧 이목총명남자신 홍균부여불위빈 須探月窟方知物 未攝天根豈識人 수탐월굴방지물 미섭천근기식인 乾遇巽時看月窟 地逢雷處見天根 건우손시간월굴 지봉뇌처견천근 天根月窟閑來往 三十六宮都是春 천근월굴한래왕 삼십육궁도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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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맏아들 청봉(靑峰 : 준래)을 성혼시키신 후에는 사가의 가계(家計)를 일임하시되, 공사(公私)의 구분을 엄격히 하시니 가계가 아무리 군색하여도 도중 공금에 의지하지 못하게 하시니라. 청봉이 혹 긴요한 일로 간절히 원하면 금품을 빌려주시되 기일을 정하여 위약함이 없도록 하시며, "도중 공금은 나도 함부로 못하거늘 네가 만약 손해를 끼칠 때는 그 죄를 어찌 감당하랴? 내 너희로 하여금 넉넉하게도 못하거니와 죄짓게도 못하느니라." 하시고, 청암(靑岩 : 승래) 청구(靑丘 : 영래) 등 자제들도 근로로 고학(苦學)하게 하시니라.
86
또 모든 가족과 임원들에게 허영과 망동(妄動)을 엄금하시고 도리와 법례에 적합하게 처신하되, 일의 대소와 경중에 구애받지 않게 하시니라.
87
상제님께서 임원들에게 하교하시기를 "오도의 주일(主日)이 갑기(甲己)일임은 토(土)를 취함인데, 시속에는 7일이 주일(週日)이나 후천에는 5일마다 주일(主日)이니, 이 주일이 주간(週間)의 나머지 4일을 주관하느니라." 하시니라.
88
또 하교하시기를 "나의 일은 세간에 퍼진 동요에서도 말하여 주고 있느니, 동요는 원래 신명이 아동들에게 비전(秘傳)함이니라." 하시니라.
89
"너희는 도운의 앞날을 알고 싶으면 동요를 살피라, 중대한 일은 동요로 전하는 일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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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옛시 한 수를 외워 주시니 이러하니라. 烏飛梨落破蛇頭 蛇變爲猪石轉雉 오비이락파사두 사변위저석전치 雉變爲人逐獐走 聞師法說解忿心 치변위인축장주 문사법설해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