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진경

제목 태극도 - 태극진경 2장
1
옥황상제님께서 정사(丁巳 : 도기 9, 단기 4250, 서기 1917)년 원조(元朝)에 초패왕(楚覇王) 항적(項籍)의 고향인 강동지방(江東地方) 절강성 회계(會稽)의 객사에 유어(留御)하시더니, 이날 새벽에 구천 상제님께서 하명하시기를 "이제 나의 도수에 따른 그대의 대중화 보은공사(大中華 報恩公事)가 끝났으니, 본가로 돌아가서 다시 나의 명교(命敎)에 따라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도통(道統)의 연맥(連脈)과 인계(人界)의 인연을 다지도록 하라. 이 곧 득도(得道)이니라." 하시니라.
2
이어 "이 글은 구세제민(救世濟民)할 주문이니 잘 기억하라." 하시며 다음의 두 주문을 외워 주시므로 암기하시고 즉일 환행길에 오르시니라. 기도주(祈禱呪)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至氣今至 願爲大降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지기금지 원위대강 태을주(太乙呪) 吽哆吽哆 太乙天上元君 吽哩哆耶都來 吽哩喊哩 娑婆啊 훔치훔치 태을천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바아
3
10여 일 후에 본댁에 환어하셔서 공부를 속행하시며 근 2개월간 외출도 하지 않으시고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천명을 기다리시니라.
4
이해 윤2월 초6일 새벽에 공부하시던 중 구천 상제님의 계시(啓示)를 받드시고, 당일로 매씨 봉귀(鳳貴)와 사촌 아우 길룡(吉龍)을 거느리시고 노고산에서 3일간 목욕재계하시며 많은 전수(奠需)를 장만하셔서 계시에 따른 "득도치성(得道致誠)"을 올리시니, 이날이 도기 9년, 정사(丁巳) 윤 2월 초 10일, 양력 4월 1일 계유(癸酉) 일진이고 시각은 계축(癸丑) 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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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축시 기도시에 구천 상제님께서 현현(顯現)하셔서 계시하시기를 "그대가 이제 득도함으로써 인계에서의 나의 도통을 다졌으니 흔감(欣感) 하도다." 하시니라.
6
이어 다음의 주문을 외워 주시니라. 운장주(雲長呪) 天下英雄 關雲長 依幕處 謹請天地 八位諸將 六丁六甲 천하영웅 관운장 의막처 근청천지 팔위제장 육정육갑 六丙六乙 所率諸將 一別兵營 邪鬼 唵唵 急急 如律令 娑婆啊 육병육을 소솔제장 일별병영 사귀 음음 급급 여율령 사바아 칠성주(七星呪) 七星如來大帝君 北斗九辰 中天大神 上朝金闕 下부崑崙 調理綱紀 칠성여래대제군 북두구신 중천대신 상조금궐 하부곤륜 조리강기 統制乾坤 大魁貪狼 文曲巨門 綠存廉貞 武曲破軍 左輔右弼 高上玉皇 통제건곤 대괴탐랑 문곡거문 녹존염정 무곡파군 좌보우필 고상옥황 紫微帝君 大周天際 細入微塵 何災不滅 何福不臻 元皇正氣 來合我身 자미제군 대주천제 세입미진 하재불멸 하복부진 원황정기 내합아신 天罡所指 晝夜常輪 俗居小人 好道求靈 願見尊儀 永保長生 三台虛精 천강소지 주야상륜 속거소인 호도구령 원견존의 영보장생 삼태허정 六淳曲生 生我養我 護我形我 虛身形 魁작관행 필보표 尊帝 急急 如律令 육순곡생 생아양아 호아형아 허신형 괴작관행 필보표 존제 급급 여율령 오주(五呪) 時天地 家家長世 日月日月 萬事知 시천지 가가장세 일월일월 만사지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福祿誠敬信 壽命誠敬信 至氣今至 願爲大降 복록성경신 수명성경신 지기금지 원위대강 明德觀音 八陰八陽 至氣今至 願爲大降 명덕관음 팔음팔양 지기금지 원위대강 三界解魔 大帝神位 願趁天尊 關聖帝君 삼계해마 대제신위 원진천존 관성제군
7
상제님께서 매씨와 길룡을 거느리시고 노고산에서 공부에 정진하시더니 공부 7일 만에 길룡이 문득 개안(開眼)하여 "정신을 집중하면 혜안(慧眼)이 열려 과거 현재 미래를 통찰할 수 있고 신통력이 생겨 하려는 일은 다 할 수 있다." 하며 기뻐하니라. 상제님께서 시험으로 그 법신(法身)을 본댁에 보내셔서 조모께서 냉수에 급체하심을 낫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개안임에 틀림없으나 대도의 도통은 아니니 기뻐하지 말라. 신통력은 함부로 사용하면 화를 자초하느니 오직 수도에만 전념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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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초에 상제님께서 하산하시어 본가에 유어 하실 때, 마침 용인(龍仁)사람 오석(烏石) 김혁(金赫)이 내방하니라. 그는 일찍 이 만주로 망명하여 구국 독립운동에 활약하는 분으로서 도장께 호형(呼兄)하는 친교의 동지인데 독립군 자금 모집책으로 자주 순회하면서 도장댁에는 매년 정초에 들르더니 "금년에는 본국 순회(本國巡廻)로 인하여 늦었나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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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은 여느 해에는 도착 즉시 도장 또는 서산공과 밀실에서 군자금 문제 등 독립운동 관계를 상의하였으나 이번에는 먼저 상제님께 정진 중이신 공부 내용과 앞으로의 계획을 묻더니, 다시 복우도장께 말씀드리기를 "제가 지난해 섣달에 군자금 모집차 본국에 갔다가 정읍(井邑)에서 이치복(李致福)을 만나 교조(敎祖) 증산선생(甑山先生)의 교법을 들었나이다. 그의 말로는 '지금 우리의 독립운동도 증산선생의 공사(公事)에 의한 천지도수에 따라야 성취될 수 있으며, 국가 인민도 그 교법이라야 광구될 수 있다.' 하였나이다. 그런데 지금 영식(令息)의 공부 내용도 그와 흡사하오니 혼자 그러지 말고 입도 치성을 올리게 하심이 좋으리이다." 하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이미 지난달에 천명과 신교를 받들어 득도하셨음을 알려 주시니 오석도 경탄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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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상제님께서 매씨와 길룡을 거느리시고 오석에게서 증산 상제님의 내력을 비롯한 신봉(信奉) 수행(修行)의 방법과 기도 치성의 절차 등 설법(說法)을 들으시니라. 그 내용이 몸소 받드신 구천 상제님의 계시와 여합부절(如合符節)할 뿐 아니라, 봉교(奉敎)하신 주문도 한자 한 구절의 틀림이 없음에 심독희자부(心獨喜自負) 하시고, 매씨와 길룡은 상제님께서 그동안 지도하신 교법이 오석의 설법과 일치함에 오석과 함께 감복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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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4월 28일 봉천명일(奉天命日)을 맞이하셔서 공부처에서 치성을 올리신 후, 다시 구천 상제님의 계시를 받드시니 "이제 그대의 중국공부도수(中國工夫度數)는 마쳤느니라. 속히 환국하여 나의 본소(本所)를 찾고 나의 삼천(三天)중 천서(天書)와 천보(天寶)를 받도록 하라. 다만 진주(眞主)로서 난법난도자(亂法亂道者)를 경계하라." 하시므로 그날로 하산하셔서 도장께 고하신 다음, 이달 말일에 매씨와 길룡을 거느리시고 환국길에 오르시니라. 이때 상제님의 보령은 23세이시고 매씨와 길룡은 13세인데 행로의 편의를 위하여 매씨를 남복(男服)으로 변장시키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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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어하시던 전날 상제님께서 그곳 노고산의 관왕묘(關王廟)에 참예(參詣)하시더니, 이튿날 아침에 묘직(廟直)이 와서 문전에 부복하고 말씀드리기를 "대인께서 다녀가신 후에 관성제군의 존상(尊像)에 수염이 없어졌사온데 이는 필시 대인의 도력에 의함인가 하오나, 만일 존상에 누가 있사오면 소인은 죄를 면할 수 없사오니, 하찰(下察)하여 주옵소서." 하고 애원하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소원을 들었으니 돌아가 살펴보라." 하시므로 돌아가 보니 옛 모습 그대로니라, 하도 신이하여 사례하고자 다시 오니 상제님께서는 이미 출어하신 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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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행을 그곳 안동(安東)까지는 마차 편을 이용하시고 압록강(鴨綠江)은 철교를 도보로 건너시니, 이때 국경인 철교에는 왜헌의 경비가 삼엄하고 통행인은 누구라도 몸수색을 당하였으나 상제님 일행은 그들의 눈에 뜨이지 않으시니라. 철교를 건너시며 상제님께서 한국말도 중국말도 아닌 방언(邦言)으로 누구와 대화하듯 말씀하시므로 매씨가 이상히 여겨 "오라버님. 지금 하신 말씀이 어느 나라 말이며, 또 누구와 대화하셨나이까?" 하니 "서양 신명들과 이야기하자니 그리하였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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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신의주(新義州)에 임어하셔서 9년 만에 고국 땅을 밟으시는 감회에 젖으시는데, 길룡은 철교를 건너자 갑자기 앞이 캄캄하고 힘이 빠지며 개안과 신통력이 일시에 걷히고 평범한 소년의 그전 상태로 환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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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도강 후에 강변의 한 어선에서 오색이 영롱한 큰 잉어 한 마리를 골라 부르는 값을 다 주고 사셔서 놓아 주시니라. 잉어는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솟아올라 상제님께 네 번 경배를 올리는 양으로 몸을 번뜩이고 광채를 발하면서 유유히 사라지니라. 매씨가 여쭈기를 "오라버님께서는 어찌하여 비싼 값으로 고기를 사서 물에 놓아 보내시나이까?" 하니 "고기나 사람이나 살려고 함이 본능이 아니냐? 이제 그 잉어는 용왕의 명으로 나의 귀국을 영접하러 왔다가 나와 상봉하게 됨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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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주에서 유어 하시고 다음날 철도편으로 한양에 임어 하셔서 광화문 객사에서 여러 날을 행재하시며 경도(京都)의 풍물을 감상하시니라. 다시 철도편으로 밀양 파서리(巴西里)의 외가에 임어 하셔서 9년 만에 상봉하신 외가 친척들의 환대를 받으시고, 며칠간 종남산(終南山) 일대의 지형 지세를 관찰하시면서 공부처를 물색하시니라. 압록강에서 개안이 걷힌 이후 짜증이 가시지 않은 길룡을 창원(昌原) 중방(中房) 그의 외가에 데려다주시고 회문리(會文里) 고향에서 친척들과 오랜만의 정회(情懷)를 나누신 후, 구천 상제님의 명에 의한 본소를 찾기 위하여 매씨를 거느리시고 다시 출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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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본소를 찾으라" 하신 구천 상제님의 계시에 따라 지체 없이 만주서 환국하셨으나 쉽게 찾을 줄 아셨던 본소에 대하여 더 이상의 자세한 계시가 없으셨고, 또 백방으로 탐문하셔도 알 수 없으시니라. 비록 오석으로부터 이치복(李致福)과 차경석(車京石)의 말은 들으셨으나 구천 상제님의 계시는 그 사람들을 찾으라는 것이 아니셨으므로 본소를 어디에 가야 찾을지 실로 막연하시니라. 한여름 불볕더위의 고초를 겪으시며 탐문 길을 재촉하시다가 8월 중순에 연산(連山)의 어느 서당에 임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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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훈장 김모는 상제님의 품격과 기상이 비범하시고 문장이 탁월하심에 감복하여 초면이면서도 지기(知己)처럼 환대하니라. 상제님께서 그에게 경과사의 대강을 말씀하시며 증산 상제님에 대하여 하문하셨으나 그는 순수한 유학자로서 상제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와 함께 그곳에서 전래의 유학을 통달하여 치세(治世)의 경륜을 펴자고 권유하면서 더욱 극진히 공대하므로 며칠을 유어 하시다가 유학으로써는 구세 제민할 수 없음을 설명하시고 다시 발정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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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사관에 임어하시니 여주인이 상제님을 흠모하여 환대하면서 유혹하였으나 상제님께서는 근엄한 태도로 응대하시며 다만, 증산 상제님에 대한 소식을 하문하시니라. 여주인은 공주(公州) 한모에게서 들은 바 있다 하며 수십 리 되는 읍내의 한모를 데려와서 증산 상제님의 소식을 아는 대로 아뢰게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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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모는 "저도 알현하지는 못하고 전해 들은 바이오나 그분은 호를 증산이라 할 뿐, 명함과 거처도 잘 알리지 않고 정읍지방을 주유하셨으며 사람들이 '강삿갓'이니 '강바람'이니 또는 '방외일민(方外逸民)'이니 하였나이다. 풍운 조화를 자유자재로 하는 신인(神人)이라고도 하였으나, 자신은 '상제' 또는 '미륵불(彌勒佛)'의 화신(化身)이라고 하시다가 수년 전에 화선(化仙)하셨다 하나이다." 하므로 상제님께서는 환국하신 후 처음 들으신 구천 상제님의 소식에 반가우셨으나 찾으시는 본소는 그도 모른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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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더욱 용기를 내셔서 증산 상제님의 강세지지(降世之地)라는 정읍 객망리, 대각지지(大覺之地)라는 모악산 대원사, 공사지지(公事之地)라는 김제 금산사와 동곡 등 유적지를 두루 답사하시고 그 종도였다는 김형렬(金亨烈) 박공우(朴公又) 등을 탐방하시니라. 그러나 모두 정감이 통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때마다 상제님의 계훈(戒訓)이 상기되셔서 경계심을 가다듬으시며 오직 본소를 찾으려는 일념으로 탐사만을 속행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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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 어느 날은 함열지방(咸悅地方)을 순행하시다가 너무 피로하시므로 큰 정자나무 아래서 잠시 휴식하시니라. 이때 홀연히 천상에서 "본소는 다음에 찾고 지금은 우선 이곳 서해(西海)의 제일 큰 섬에 가서 근거지를 마련하고 공부하며 화회(下回)를 기다리라." 하고 계시하시므로 "이는 분명 구천 상제님의 도수리라."확신하시고 태안(泰安)의 안면도(安眠島)를 향하여 출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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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에 임어하셔서 첫포덕으로 입도시키신 이정률(李正律)은 그곳 창기리(倉基里)에서 농사를 지으며 섬 안에서는 신망이 높은 사람으로서 상제님께 처음 뵈었을 때부터 그 기상과 도력에 감복하여 지성으로 수종하니라. 상제님께서 그의 주선으로 정당리(正堂里) 어락곡(於樂谷)의 주택을 매수, 수리하셔서 공부처로 정하시고 "우일재(宇一齋)"라 명명(命名)하신 다음, 그 아들 상우(商雨)를 입도시켜 시봉으로 명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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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창원으로 사람을 보내셔서 길룡을 데려오게 하시고 만주의 가족도 그곳에 와서 함께 살도록 하시니라. 도장을 위시한 일부 가족은 그해 10월에, 남은 가족은 다음 해 봄에 모두 귀환하여 상제님의 교도(敎導)에 따라 입도 치성을 올린 다음, 우일재에서 공부하는 한편 농지를 마련하여 농사에 주력하게 하시니 생계도 안정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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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무오(戊午 : 도기 10, 단기 4251, 서기 1918)년 정월에 상우에게 포덕을 명하시니 그 사촌 아우 상식(商植)과 이웃 주민 30여 인이 입도하니라. 도인들에게 우일재에서 기도주 또는 태을주를 연송하며 공부하게 하시더니 7일이 되던 날 박봉운(朴奉云)이 공부 중 갑자기 큰소리로 "나는 뵈었노라. 진실로 뵈었노라. 옥황상제님을 뵈었노라." 하며 춤을 추기도 하고 크게 웃기도 하며 기쁨에 넘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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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방에서 공부하던 이상우를 비롯한 도인들이 이상히 여겨 이를 제지하였으나 그의 힘이 너무 세어 당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처음 보는 일이므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니라. 이때 옆방에서 공부하시던 상제님께서 "봉운아" 하고 부르시니 봉운이 놀라며 움직이지 않고 섰다가 이윽고 존전(尊前)에 나아가 "옥황상제님께 배례 올리옵나이다." 하며 법배(法拜)를 올리는데 방법이 어긋나면 고쳐서 정식으로 사배를 올리니라. 봉운이 정신을 가다듬고 말하기를 "아무에게나 함부로 발설하지 못할 일이나, 내가 천상에 계신 옥황상제님의 옥안을 뵈었는데 바로 이 어른이 그 어른이시니 다시 함께 사배를 올리자." 하므로 일동이 사배를 올리니라. 상제님께서는 "오직 천기니라." 하시고 모두에게 수구여병(守口如甁) 하도록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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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운은 그 후에도 수차 그러한 행동을 하더니 그때마다 상제님께서 부르시면 즉시 중지하니라. 하루는 상제님께서 치성을 올린 전수(奠需)를 전부 내려 주시며 음복하도록 명하시니 봉운은 그 많은 음식을 거의 다 먹으므로 "네가 비록 옳게 보았어도 이는 허령(虛靈)이니 이를 거두노라." 하시며 봉운을 꿇어 앉히시고 담뱃가루 한 되를 마른 흙가루에 섞어 주시며 "이 담배와 흙을 이 자리에서 가려내라." 하시니라. 봉운이 온종일 꿇어앉아 얼굴도 들지 않고 가리더니 이로부터 허령 기운이 걷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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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상식을 다시 시봉으로 명하셔서 모든 심부름을 시키시며 귀여워하시고 같은 연배인 길룡과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시며 때로는 씨름도 하게 하시니라. 하루는 어린 염소 한 마리를 사 주셔서 잘 기르도록 하시더니 그 후 염소가 크게 자라매 길룡과 상식을 타 보게 하시고 뿔을 잡고 밀어 보게 하시니라. 그들이 아무리 밀어도 밀리지 않고 도리어 넘어짐을 보시고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염소도 소는 소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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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추석에 가족과 도인들이 우일재에 모여 명절 치성(名節致誠)을 올린 후, 당년 농사가 풍작이라 하여 모두 기뻐함을 보시고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농사가 잘된 것도 좋은 일이나 우리는 공부와 포덕에 진력함이 본분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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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본소를 찾는 일이 급선무니 전라도로 떠나리라." 하시고 이튿날 출어하시니 상우가 수종하니라. 이는 그동안 정률을 전라도로 보내셔서 본소 탐문을 하명하셨던바 돌아와서 "증산 상제님께서는 이미 화천하셨으나 전라도 정읍지방에 가시면 소상한 내력을 알 수 있고 본소도 찾으실 듯하나이다." 하고 보고한 연유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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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당초에 오석이 말한 이치복과 차경석은 구천 상제님께서 계시로써 경계하신 인물이라 생각되어 찾지 않으시고, 또 객망리나 동곡 등 유적지는 이미 그들이 더렵혔거나 손상시켰을 뿐 아니라, 구천 상제님의 계시는 어느 사람이나 지역을 지적하심이 아니고 본소를 찾으라고만 하셨으니 "이는 필시 비장지처(秘藏之處)리라"확신하시며 지금까지 때를 기다리셨던 것이니라. 그러나 본소를 찾기 위하여는 부득이 증산 상제님의 성도(聖徒)들에게 수소문하지 않을 수 없으셔서 우선 원평(院坪)의 김자현(金自賢)을 찾으시니 자현은 출타 중이고 아들 태진(泰振)이 있어 영접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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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진이 사뢰기를 "가친이 증산선생님의 종도임은 사실이옵니다. 선생님 화천 후에 그 종도인 이치복 차경석 김형렬 등이 각기 교단을 세웠으나 모두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혐의로 일부는 관에 구금되고 가친 또한 부재 중이옵니다. 선생님께서는 미륵불 또는 상제로 자처하셨으나 그 종도들은 음양술객(陰陽術客)으로밖에 나타내지 못하고 있으니, 가친을 만나 보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이까?" 하니라. 그날 밤에 자현이 귀가하여 상제님의 귀에 입을 대며 말씀드리기를 "증산선생님께서 나의 귀에 입을 이렇게 대시고 '도통은 자네에게만 줌세'라고 하셨다" 하며 그 시늉을 내니라. 상제님께서 본소에 대하여 캐물으셨으나 그는 들은 일조차 없었다 하였으며, 그 후에 다시 만나신 김광찬(金光贊) 역시 상제님의 귀에 대고 자현과 같이 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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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10여 일을 원평에 행재하시며 사방으로 수소문하셨으나 모두 이와 같으므로 아직 본소를 찾을 운도(運度)가 아니니 더욱 공부하면서 천명을 기다리기로 결심하시고 안면도 우일재로 환어하셔서 공부를 계속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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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상제님께서 우일재 공부를 마치신 다음, 시종들을 거느리시고 다시 원평으로 행행하셔서 정률로 하여금 정읍군 감곡면 계룡리(桂龍里) 황새마을 이병건(李炳健)의 집을 매수하게 하셔서 공부하시며 천명을 기다리기로 하시고 이해 12월에 안면도의 가족과 도인 일부를 그곳으로 이사시키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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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황새마을 공부처에서 수도하시며 포덕하시니 30여 인이 입도하니라. 이 소식을 들은 이치복이 여러 차례 찾아와서 "증산선생님께서 '해인(海印)은 너에게 주신다' 하셨으므로 그 교법과 공사가 모두 나를 위하여 하신 것이니 나의 제화교(濟化敎)를 믿고 수도하면 될 터인데 본소는 찾아서 무엇하리오?" 하며 유인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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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26일에 상제님께서 황새마을 공부처에서 여러 도인을 거느리고 공부하시더니 신시 경에 자못 기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오늘 초패왕(楚覇王)의 원(寃)척을 풀었노라. 이제 후천 해원 도수의 이 공사로써 그 원척을 풀었으니 이로부터 인간 세상의 모든 원척이 차츰 풀리어 상생(相生)의 새 판국이 열리리라. 천지간의 원척이 신명과 사람 사이에도 쌓여 있고, 또 나라와 나라 사이, 금수초목(禽獸草木)에까지 없는 곳이 없어서 군생(群生)이 척신 망령(妄靈)에 시달림을 받았으니 어찌 평온한 날이 있었으리오? 그러나 이 해원 도수에 따라 모두 해원 광구(匡救)되어 장차 오만 년 청화선경(淸華仙境)이 절로 이루어지게 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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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己未 : 도기 11, 단기 4252, 서기 1919)년 원조에 상제님께서 명절 치성을 올리신 후, 도인들에게 하교하시기를 "내가 봉천명 한지도 어언 10년이 되었으나 아직 본소를 찾지 못하고 도체(道體)도 갖추지 못하였으되, 금년에는 정녕 이루리니 너희들은 구천 상제님과 나의 도수를 믿고 가일층 정려(精勵)할지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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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15일에 명절 치성으로 철야하시고 공부를 계속하시던 중, 구천 상제님께서 계시하시기를 "보라, 때가 이르렀으니 이제 본소가 그대 눈앞에 다가왔도다. 3년간의 일념이 도수와 부합됨이니라. 이 본소는 무극(无極)의 대도로써 광구 천하의 진법을 응원(應元), 보화(普化)할 만국 본소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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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상제님께서 천안(天眼)으로 한 여인이 찾아옴을 관감(觀感)하시니라. 상우를 시종 시키시고 문간에 거동하셔서 "반가운 손이 오는도다." 하시며 먼 곳을 바라보시니, 한 여인이 눈보라 속을 헤치고 달려와서 상제님께 공손히 경례하며, "대인께서 만주 봉천에서 오셔서 증산선생님의 본소를 찾고자 하시옵나이까?" 하고 여쭈니라. 상제님께서 "그렇노라." 하시고 추위에 떠는 여인을 따뜻한 방으로 인도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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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아뢰기를 "저의 남편은 김기부(金基夫)이옵고 저는 박가(朴哥)이옵니다. 저희가 정읍 북면 화해리(花海里)에 살면서 증산선생님 재세시(在世時)에는 김승연(金昇淵)과 함께 시봉하다가 화천하신 후에는 유족을 섬기고 있사옵니다. 유족은 권 씨 대모(權氏大母)님, 정 씨 사모(鄭氏師母)님, 순임낭자(舜任娘子) 세 분이신데 당초에 객망리에 사시더니, 선생님의 매씨 선돌 부인께서 몇 년 전에 화해리 마동(馬洞) 당신 댁으로 합솔하게 하셔서 지금까지 사시옵니다. 그 집은 본래 선생님께옵서 화천 전년 가을에 사셔서 선돌 부인에게 주신 것이 옵니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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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부인께서는 지금 39세 시오며 일찍이 고부 입석리(立石里)의 박(朴) 씨 댁에 출가하셨으나, 10년이 넘도록 소생이 없으셔서 남편 박창국(朴昌國)이 소실을 두고 박대가 심하므로 선생님께서 그 집을 사 주셔서 따로 살게 하셨나이다. 선생님께서 화천 당년 정월 15일에 그 집을 손수 수리하시고 도배까지 하셨으며 부인에게 "이곳이 나의 본소니라. 너는 이곳에 살다가 10년 후 이날, 이 본소를 찾는 후천진인(後天眞人) 을미생(乙未生)에게 나의 도통을 전하라." 하는 요지로 하명하셨다 하옵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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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께서는 현숙하신 성품으로 유명(遺命)을 받들어 일심으로 10년을 고대하고 계시옵니다. 저희는 부인을 고모님으로 존대하며 시종하고 있사온데 오늘 아침 절사 후에 고모님께서 저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처음으로 말씀하시고 "오늘 새벽 하느님의 계시를 받들매 만주 봉천에서 오신 조(趙) 씨라는 청년도사가 지금 원평 건너 황새마을에서 공부하며 본소를 찾으려고 애쓴다고 하시니 네가 가서 사실을 알아본 다음, 너의 집에 모시고 내게 전하라." 하셔서 이렇게 찾아뵈었사오니 속히 가사이다." 하므로 상제님께서 그 말에 따라 박 여인 집으로 임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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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여인의 말에 의하면 고모께서는 이에 앞서 갑인(甲寅 : 도기 6, 서기 1914)년 봄에 이곳에 황해철(黃海喆)이 찾아와서 고모의 지도하에 2년간 공부하다 이루지 못하고, 이어서 병진(丙辰 : 도기 8, 서기 1916)년 가을에는 박(朴)모라는 수도인이 제자 송(宋)모를 데리고 고모께 찾아와서 "제가 들은 바에는 '후천 진인은 을미생이요, 천문(天文) 천서(天書)는 마동출(馬洞出)이라' 하였는데 이곳 마동은 장차 천하만국사무소(天下萬國事務所)가 될 영지(靈地)이오니 이 사람에게 공부의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하고 부탁하니라. 고모께서는 송모에게 기대를 걸고 공부시켰으나 3년이 되도록 성취하지 못하므로 안타까워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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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구천 상제님께서 고모에게 계시하시기를 "시유기시(時有其時)요 인유기인(人有其人)인데 네 눈이 그리 어두우냐? 그자는 진인이 아니니 돌려보내라. 이제 내 일의 성취자며 나와 일체(一體)인 진인 을미생을 만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고모께서는 3년간 돌보아 준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고 주저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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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에 다시 그와 같은 계시가 있어 고모께서는 결의를 굳히셨으나 송모가 더 있기를 애원하므로 고모께서도 인정상 박절하게 할 수 없어 고민하시는데, 이번에는 상제님께서 크게 꾸짖으시며 "당장 돌려보내지 않으면 네가 독사의 피를 맨발로 밟게 하리라." 하시며 발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보이시니라. 고모께서 이때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나므로 살피시니 상제님의 발바닥에 묻었던 핏자국 모양처럼 빨갛게 응혈(凝血) 되는지라, 이에 마음을 굳혀 송모를 추방하시니 통증과 응혈이 이내 풀리셨다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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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께서는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상제님을 우선 박 여인 집에 모시게 하시고 며칠간 동정을 살피시는데, 19일 밤에 다시 계시하시기를 "무엇을 망설이느냐?" 그분은 나의 공사를 성취할 진법의 진주니 나를 본 듯이 맞으라." 하시며 가족들에게 그 용안(龍顔)까지 계시로 보여 주시므로 다음 날 아침에 상제님을 본소로 모셔오라는 기별을 하시어, 상제님께서 당도하시자 대모를 비롯한 가족들이 지난밤 꿈에 보신 상제님의 용안과 같으시므로 "맞다 맞다! 꿈에 본 그 진인이 맞다!" 하시며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으시니라. 상제님께서는 가족들과 수인사를 나누시고 미리 준비하신 비단을 예물로 드리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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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을 맞으신 가족들은 계시에서 보신 대로 천종(天縱)의 도태(道態)와 뛰어나신 도량, 공손하신 언동에 감복하여 못내 기뻐하시니라. 대모께서는 "내 아들과 같은 천지의 진인을 살아서 대하니 여한이 없도다!" 하시며 손을 잡고 감동하여 흐느끼시고, 고모께서는 본소의 내력을 비롯하여 황해철과 송모에 관한 경위 등을 설명하신 다음, "이제야 진인을 만났으니 기쁘기 '한이 없으나' 잠시라도 송 황의 일로 인하여 진인을 의심하였으니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더구나 현무경(玄武經)과 주문책(呪文冊) 등은 모두 그들에게 주었는데 회수할 수 없으니 어찌하면 좋으리오?" 하시며 민망히 여기시고 안타까워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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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대모와 고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무 심려하지 마옵소서. 상제님의 진품 증표(眞品證票)는 반드시 진주인 나에게 전수될 것을 굳게 믿고 있나이다." 하시니라. 이때 문득 옛날 진시황(秦始皇)의 갱유분서(坑儒焚書)에도 칠서(漆書)가 벽 속에 보존 전래 된 고사(故事)가 상기되셔서 "증산 상제님의 본소가 이곳이라면 도통의 증표도 이곳에 있으리라." 확실하시고 증산 상제님께서 친히 도배하신 벽과 천정을 유심히 살피시는데, 앉으셨던 바로 뒷벽의 천정 아래에 시선이 닿으시자 형언할 수 없는 영감(靈感) 속에 한 곳이 섬광으로 번쩍이므로 일어나셔서 그곳을 두드리시니 속이 비어 있는 소리가 나니라. 이를 보신 고모께서 도배를 뜯으시고 호미로 벽을 파시니 과연 그 속에 목함(木函)이 마련되어 있음으로 상제님께서 그 함 문을 여시니, 안에서 전광(電光)이 발산하고 가대(家垈)와 벽이 진동하였으며 "천서(天書)"인 현무경과 주문서가 비장 되어 있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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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서를 발견하신 상제님께서는 물론, 이를 본 유족들도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라 묵묵히 서로 쳐다보기만 하니라. 상제님께서 천서를 향하여 사배를 올리시고 부복 심고 하신 다음, 정중히 천서를 내리셔서 대모와 고모에게 펴 보이시고 증산 상제님께서 친히 쓰신 천서임을 확인하게 하시니, 대모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이야말로 친필(親筆)의 진서(眞書)요, 천서로다. 내 일찍부터 증산이 내 아들이기보다도 상제이심을 깨닫고 현무경이 천서임을 믿었지마는 이렇게 비장(秘藏) 한 줄 몰랐고, 그대가 또 이렇게 전수(傳受) 하게 될 줄을 몰랐도다. 그 상제에 그 진주로다." 하시니라.
50
고모께서도 "오라버님께서 만 10년 전에 '이 집에 네가 살다가 진인에게 전하라. 이 집이 본소니라.' 하시고 어젯밤에는 '무엇을 망설이느냐?' 하셔서 대인께서 진법의 진주 이심을 확신하였으나, 지금까지 여러 사람이 마당과 방구들까지 파 보았어도 찾지 못한 진필(眞筆) 천서를 이렇게 전수 하심으로써 상제님의 도통(道統)을 계승하실 줄을 몰랐나이다. 그동안 황해철과 송모가 가져간 위본(僞本) 현무경과 주문책을 진본(眞本)으로 잘못 알고 걱정하였더니 이천서로써 모든 걱정이 풀렸나이다. 과연 진인이라야 능히 진서를 지니실 구천의 도수를 깨달았사오며 나의 소임 또한 이로써 다함이라 생각하나이다." 하시며 천서를 비단 보자기에 싸서 상제님께 드리니 이날이 정월 20일 우수절(雨水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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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서는 한지를 사방 9촌으로 접어서 철하고 증산상제님께서 친필하신 책이니라. 현무경은 13장 26면에 문자와 부도(符圖)가 기록되어 있으니 권말(卷末) 부록(附錄)과 같으며, 주문서는 표지에 "주문(呪文)"이라 쓰여 있고 7장 13면에 12종의 주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미 계시로 봉승(奉承)하신 5종의 주문과 다음 7종의 주문이니라. 진법주(眞法呪) 九天 下鑑之位 구천 하감지위 玉皇上帝 下鑑之位 옥황상제 하감지위 釋迦如來 下鑑之位 서가여래 하감지위 冥府十王 應鑑之位 명부시왕 응감지위 五岳山王 應鑑之位 오악산왕 응감지위 四海龍王 應鑑之位 사해용왕 응감지위 四時龍王 應鑑之位 사시토왕 응감지위 關聖帝君 應鑑之位 관성제군 응감지위 七星大帝 應鑑之位 칠성대제 응감지위 直先祖 下鑑之位 직선조 하감지위 外先祖 應鑑之位 외선조 응감지위 密直使者 來待之位 밀직사자 내대지위 右直使者 來待之位 우직사자 내대지위 左直使者 來待之位 좌직사자 내대지위 冥府使者 來待之位 명부사자 내대지위 天藏吉方하야 以賜眞人하시나니 勿秘昭示하사 所願成就케 하옵소서 천장길방 이사진인 물비소시 소원성취 이십팔수주(二十八宿呪) 角亢 ?房心尾箕 斗牛女虛危室壁 奎婁胃昻畢紫參 井鬼柳星張翼軫 각항저방심미기 두우여허위실벽 규루위모필자삼 정귀유성장익진 鄧禹 馬成 吳漢 王梁 賈復 陳俊 耿? 杜茂 寇恂 傅俊 岑彭 堅? 등우 마성 오한 왕량 가복 진준 경감 두무 구순 부준 잠팽 견담 馮異 王覇 朱祐 任光 祭遵 李忠 景丹 萬修 蓋延 ?? ?期 劉植 풍이 왕패 주우 임광 좨준 이충 경단 만수 합연 비융 요기 유식 耿純 臧宮 馬武 劉隆 諸大神將 所率諸將 一般兵營 唵唵 急急 如律令 경순 장궁 마무 유융 제대신장 소솔제장 일반병영 음음 급급 여율령 이십사절주(二十四節呪) 立春 雨水 驚蟄 春分 淸明 穀雨 立夏 小滿 芒種 夏至 小暑 大暑 立秋 處暑 白露 입춘 우수 춘분 춘분 청명 곡우 입하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 입추 처서 백로 秋分 寒露 霜降 立冬 小雪 大雪 冬至 小寒 大寒 長孫無忌 孝恭 杜如晦 추분 한로 상강 입동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 장손무기 효공 두여회 魏徵 房玄齡 高士廉 慰遲敬德 李靖 蕭瑀 段志玄 劉弘基 屈突通 殷開山 위징 방현령 고사렴 울지경덕 이정 소우 단지현 유홍기 굴돌통 은개산 柴紹 長孫順德 張亮 侯君集 張公謹 程知節 虞世南 劉政會 唐儉 李世勣 秦叔寶 시소 장손순덕 장량 후군집 장공근 정지절 우세남 유정회 당검 이세적 진숙보 諸大神將 卽通 天文地理 風雲造化 八門遁甲 六丁六甲 智慧勇力 唵唵 急急 如律令 제대신장 즉통 천문지리 풍운조화 팔문둔갑 육정육갑 지혜용력 음음 급급 여율령 도통주(道通呪) 天上元龍 坎武太乙星 斗牛君 神 ? 神? 參? 參? 以道通道德으로 천상원룡 감무태을성 두우군 신아신아 삼아삼아 이도통도덕 上通天文하고 下達地理하고 中察人事케 하옵소서 상통천문 하달지리 중찰인사 개벽주(開闢呪) 天上玉京天尊神將 天上玉京太乙神將 玉京玉樞守門將軍 上下變局雷聲霹靂將軍 천상옥경천존신장 천상옥경태을신장 옥경옥추수문장군 상하변국뇌성벽력장군 白馬元帥大將軍 雷聲 ?惡將軍 惡鬼雜鬼禁亂將軍 三首三界都元帥 地神霹靂大將軍 백마원수대장군 뇌성벽악장군 악귀잡귀금란장군 삼수삼계도원수 지신벽력대장군 天動地動陰陽霹靂大將軍 左部關元帥 右部馬元帥 天地造化風雲神將 陰陽五行奇門神將 천동지동음양벽력대장군 좌부관원수 우부마원수 천지조화풍운신장 음양오행기문신장 六丁六甲遁甲神將 太極斗破八門神將 山上吹嘯猛虎將軍 多率神軍百騎將軍 龍盤虎踞鬼哭神將 육정육갑둔갑신장 태극두파팔문신장 산상취소맹호장군 다솔신군백기장군 용반호거귀곡신장 千萬惡鬼打首神將 ? 魅? ? 揮致神將 法律邪魔盡滅神將 風濤殺首呼天神將 五百年間一享神長 천만악귀타수신장 이매망량휘치신장 법률사마진멸신장 풍도살수호천신장 오백년간일향신장 三台七星諸大神將 二十八宿諸位神將 啓明長庚二府神將 九辰太白禁令神將 二十四節諸大神將 삼태칠성제대신장 이십팔수제위신장 계명장경이부신장 구신태백금령신장 이십사절제대신장 十二辰諸部神將 天地五方號令神將 上下八位巡察神將 萬里風雲轉化神將 六丁六甲所率神將 십이신제부신장 천지오방호령신장 상하팔위순찰신장 만리풍운전화신장 육정육갑소솔신장 九靈三精應元神將 萬古歷代英雄豪傑諸大神將 統合天四將 四十八大將軍 四萬神將 구령삼정응원신장 만고역대영웅호걸제대신장 통합천사장 사십팔대장군 사만신장 八萬四千諸大神將 感我微誠 助我宇一 大運大事 改改降臨降臨 侍衛我奉命身 大運大命 팔만사천제대신장 감아미성 조아우일 대운대사 개개강림강림 시위아봉명신 대운대명 太一聖哲 常隨不離 大道通 大位定 與天地合 與四時合 與陰陽合 與五行合 通天地 通萬古 태일성철 상수불리 대도통 대위정 여천지합 여사시합 여음양합 여오행합 통천지 통만고 通五方 通四海 四海應身 力拔山岳 威振乾坤天地 道通天地造化 無窮不息 進退有法 통오방 통사해 사해응신 역발산악 위진건곤천지 도통천지조화 무궁불식 진퇴유법 吾奉九天上世君 勅速勅速 唵唵 急急 如律令 오봉구천상세군 칙속칙속 음음 급급 여율령 해마주(解魔呪) 三界解魔 大帝神位 願? 天尊 關聖帝君 삼계해마 대제신위 원진천존 관성제군 신성주(神聖呪) 神聖大帝 太乙賢首 於我降說 範於靈極 신성대제 태을현수 어아강설 범어영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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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천서를 받드시고 대모와 고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제가 이제 진법의 진주임이 천의(天意)로 밝혀졌으니, 이 방 또한 상제님께서 저에게 주신 본소며 공부처 이옵니다. 지금부터 천서를 받들고 이 방에서 공부하겠사오니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라나이다." 하시니 흔쾌히 응낙하시고 주선하여 주시므로 그 방을 공부실로 정하셔서 외인의 출입을 금하시고 백일공부에 임하시니라.
53
이때 상우에게 하명하시기를 "너는 곧 황새마을로 가서 네가 본대로 이 소식을 전하되, 나의 일은 모두 천기니, 외인에게는 누설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도인들을 독려하여 포덕에 더욱 힘쓰도록 하라. 이곳에는 누구의 왕래도 금하되, 너는 5일에 한 번씩 와서 경과를 보고하고 명령을 받아 갈 것이며, 상식을 이곳으로 보내어 나를 시봉하게 하라." 하시므로 상우가 명을 받들어 봉행하니라.
54
상우가 본소와 천서의 소식을 알리고 하명을 전하니 가족과 도인들의 감격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으며, 포덕이 날로 늘어나서 황새마을에는 도인들의 내왕으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니라. 상우가 명령대로 5일 만에 본소에 가서 상제님께 배알하고 황새마을의 경과와 시국의 사정을 보고하니 "너희들은 오직 공부와 포덕에만 전념하라." 하시고 더 말씀이 없으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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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 3일에 상우가 다시 본소에 가니 상제님께서 하명하시기를 "이번에 이 나라 전역에 걸친 독립 만세운동은 이미 구천 상제님께서 짜 놓으신 도수에 의함이며, 내가 이제 공부로써 결정함이니 아버님과 숙부께 말씀드려 전도인이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라. 또 너는 속히 안면도에 가서 그곳 도인들에게 나의 소식과 명령을 전달하여 포덕에 더욱 진력하는 동시, 거사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고 그곳에 남은 가족은 황새마을로 이사하되 가산은 정리하여 황새마을에 대토(代土)하도록 하라." 하시니라. 안면도 가족이 이사할 때 삼일운동을 제압하려는 왜경의 단속으로 극심한 고난을 겪었으나 낭패는 없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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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도인들은 거족적으로 궐기한 독립 만세운동에 가담 여부를 주저하던 차에 상우의 전령을 받고 사기충천하여 왜경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적극 참여하니라. 혹은 지방에서 집단행사를 주관하기도 하고, 혹은 중앙과의 연락을 취하기도 하여 그 수가 만 명이 넘었으나 다행히 왜경에게 해를 입은 도인은 없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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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에 상제님께서 본소에서 백일공부를 마치시고 고모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번에 공부를 무사히 성취함은 부인의 공덕이옵니다. 나는 이번 공부로써 천서의 진리를 체득하온바, 이제 진주로서 구천의 도수에 따른 대도를 선포하여야 할 방책이 확립되었나이다. 부인께서는 앞으로도 증산 상제님의 유업(遺業)을 받들던 성경신으로써 도의 일을 계속 추원(推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대도 사업을 위하여 가족들은 황새마을로 이사하여 도인들과 더불어 생활하심이 좋으리이다." 하시니라. 고모께서도 흔연히 동의하시고 말씀대로 시행하여 이때부터 평생토록 창도 사업을 보좌하시니 고모의 도호는 선덕 부인(宣德夫人)이시며 도인들은 도중 고모(道中姑母)님으로 존칭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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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황새마을로 환어하셔서 도인들에게 하명하시기를 "내가 본소와 천서를 찾아 구천 상제님의 도통(道統)을 봉승하고 백일공부를 마침으로써 상제님께서 짜 놓으신 도수에 따른 나의 할 일이 확정되었으니 그대들은 내가 하는 일이 곧 증산 상제님의 일임을 믿고 따를지니라. 상제님의 유족은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여 편히 모시도록 하라. 나는 다시 조용한 곳에 가서 공부하며 도수를 보려 하니 상우는 자주 와서 영을 받아 가라." 하시고 청도리 구성산(九星山) 학선암(學仙庵)에 설석(設席) 하셔서 공부하시니 조주일(曺周一)이 시봉하고 상우는 5일에 한 차례씩 배알하여 봉명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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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7월 그믐에 상제님께서 학선암에서 백일공부를 마치시고 환어하시니 황새마을 집은 많은 도인들로 인하여 번잡할뿐더러, 동네 가운데 있어서 공부하시기에 적합하지 않음으로 감곡면 통사동(通士洞)의 한적한 이씨재실(李氏齋室) 영모재(永慕齋)를 얻으셔서 가족 일부를 이사시키시고 공부설석하시니 상우와 주일 등이 시봉하였으며, 재실 주인 이준세(李俊世)도 입도하여 수종하니라.
60
상제님께서 하시는 공부는 실내에서 독좌(獨坐) 수행하시며 시봉들이 문밖에서 교대로 수직하여 외인의 접근을 일체 금하게 하시므로 누구도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니라. 다만, 24 절후에는 많은 전수를 장만하게 하셔서 공부실에서 절후가 드는 시각을 기하여 치성을 올리시며 여러 도인들을 참례시키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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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순에 상우에게 하명하시기를 "미구에 들어오는 큰 도수에는 도의 심복이 될 천하장사 두어 사람이 필요하니 너는 도장께 가서 구인지사(求人之事)를 여쭈어라." 하시므로 상우가 황새마을에 가서 그대로 여쭈니라. 도장께서는 왕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하실 때의 동지들을 통하여 수소문하신 끝에 함경도 백두산 산중까지 가셔서 독립투사 최승오(崔勝五) 김계철(金啓澈)을 달포 만에 데려오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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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김 두 사람은 힘이 세고 몸이 날랜 장사로서 구국운동에 활약하더니 도장의 청탁으로 통사동에 와서 상제님께 배알하니라. 상제님께서는 10여 일을 매일 호궤(犒饋)만 시키실 뿐, 할 일을 하명하지 않으시므로 그들은 궁금도 하거니와 송구하여 명령만을 기다리는 데 솟아오르는 힘을 억제하지 못하여 둘이서 힘겨루기를 하면서 시일을 보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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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아침에 증산 상제님 강세일 치성 준비차 가족과 도인들이 통사동 공부처에 모이니 상제님께서 치성 준비를 중지시키고 도장을 위시한 전 가족을 공부실에 모이게 하셔서 공석(公席)을 설하신 다음, 말씀하시기를 "이 말씀은 천기에 속하여 부모 형제간이라도 기휘(忌諱)하여야 되는 천지 대사이므로 누설하면 아니 되는 일임을 명심하시고 들어주시기를 먼저 사뢰옵니다. 저는 15세에 봉천명하고 도강이서(渡江而西)하여 정진주지도수(定眞主之度數)하였사오며 그 후 만 10년의 공부로써 무극대도(无極大道)의 진주가 갖추어야 할 삼천(三天)중의 이천(천명, 천서)은 이미 받들었사오니 이번에 '천보(天寶)'만 받들면 되옵니다. 사사로이는 어른들께 송구하오나 이러한 대운 대사의 성취를 위한 공사에는 인세의 척분(戚分)에 구애될 수 없사오니 해량(海諒)하옵소서." 하시니라. 이때 참예(參詣)한 전 가족은 대도의 지중함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결의를 엄숙히 다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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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공부실에서 나간 후에 서산공을 위시하여 권태로(權泰魯) 권영문(權寧文) 이정두(李正斗) 김사일(金思日) 박붕래(朴朋來)와 두 장사를 입시(入侍)하게 하시고 하명하시기를 "이제 두 장사가 기다리던 일을 할 때가 되었노라. 자세한 일은 그곳에 가서 지시할 것이로되, 그대들이 내 영에 몸 바쳐 준행할 것을 다짐하느뇨?" 하셔서 서약을 받으시니라. 이어 술 한 잔씩을 하사하시며 "내가 지금 그대들의 도움을 얻고자 하는 일은 천지 대도의 도수에 맞추어 천보를 받드는 일이니라." 하신 다음, 일행을 거느리시고 통사동을 출어하시며 담화와 흡연을 금하시니라.
65
이날 술(戌)시 경에 정읍 대흥리(大興里)에 임어하셔서 보천교(普天敎) 도장 건너편 언덕 위 소나무 숲속에 자리를 정하시니라. 이때 보천교에서는 교도 수백 명이 모여 증산 상제님 강세일 치성 준비로 넓은 도장 곳곳에 횃불을 밝혔으므로 일대가 대낮같이 밝아 건물과 통로의 상태는 물론, 교도들의 동태도 낱낱이 살필 수 있으니라.
66
상제님께서 보천교 도장을 가리키시며 일동에게 하명하시기를 "우리는 오늘 밤 보천교의 치성이 끝난 후에 저들이 숨기고 있는 증산 상제님의 둔궤(遁櫃)를 통사동 공부처로 모셔가야 하느니라." 하시고 각자의 행동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시니라.
67
자정이 지나 일동을 출발시키시니 승오가 서까래 크기의 소나무 한 그루를 뽑아 곤봉을 만들어 지니고 앞장서므로 상제님께서 "사람을 상하게 하여서는 절대로 아니 되느니라." 하시니라. 일행이 보천교 도장에 당도하여 본당까지 들어가는 동안 보천교도 들이 각 방에 많이 모여 있었으나 한 사람도 내다보지 않으니라.
68
상제님께서 각 방문 앞마다 교도들의 신발이 많음을 보시고 승오로 하여금 곤봉으로 본당 마루를 힘껏 내리쳐서 교도들을 깨우게 하신 다음, 몸소 우레 같은 용성(龍聲)으로 "천명에 의하여 천보를 모셔 가리니 순순히 응하라. 만약 거역하는 자는 천벌을 받으리라." 하시니 교도들은 청천벽력 같은 일에 겁이 나서 꼼짝도 못 하니라. 상제님께서 각 방을 수색하게 하셨으나 둔궤를 찾지 못하므로 친히 한 방에 임어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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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그 방에 병풍으로 가려 놓은 둔궤와 약장을 발견하시고 두 장사로 하여금 대청으로 들어내게 하시고 출어하시며 승오에게 명하셔서 약장은 그대로 두고 둔궤만 지고 나가게 하신 다음, 일행을 재촉하여 회정 하시며 계철에게 대문을 지키고 서서 보천교도의 추적을 막게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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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보천교도들은 치성을 마치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가 벼락같은 호통 소리에 혼비백산하였는데 "둔궤 가져간다." 하는 누군가의 고함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어 보니 어떤 장사가 둔궤를 지고 대문을 나가고 있으니라. 뛰쳐나와 뒤쫓았으나 또 한 장사가 대문을 지키고 서서 추적을 막으므로 더 쫓지 못하고 장사들이 대문 밖으로 나간 다음에야 일제히 일어나 벌떼같이 나서서 추격하니라.
71
승오는 둔궤를 지고 뛰어가면서 추격자들을 덤비는 대로 밀어내서 따돌렸으나 그 수가 너무 많아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우니라. 이때 계철이 상제님의 신변을 경호하여 드리려 하니 "나는 괜찮으니 승오를 도와주라." 하시니라. 계철이 승오를 도와 산길로 들어가서 숲속에 둔궤를 안치(安置)하고 되돌아오니 일행의 행방은 알 수 없고, 온 들판이 추적자들로 가득하며, 달빛과 함께 그들이 든 횃불이 밝아 더 지체할 수 없으니라. 다시 산으로 가서 둔궤를 지고 걸음을 재촉하여 날이 샐 무렵 통사동 공부처로 돌아오니라.
72
공부처에서는 도장을 비롯한 가족과 도인들이 밤을 새워 일행을 기다리더니 두 장사만 돌아와서 경과사를 말하되 상제님의 안부는 모른다 하니라. 도장께서 크게 걱정하시며 장사들에게 "혹시 그 신상에 변고가 생김은 아니냐, 둔궤만 있고 주인이 없으면 어찌하느냐?" 하시니라. 진(辰) 시경까지 환어하지 않으시므로 몸소 사람들을 거느리고 찾아 나서셔서 태인(泰仁)가는 큰길에 이르셨을 때, 서산공 일행만 만나시니라. 그들 역시 밤새도록 상제님을 찾다가 환어하신 줄 알고 돌아오는 길이라 하므로 일행은 다시 합류하여 정읍 방면으로 찾아 나서시니라.
73
이에 앞서 상제님께서는 계철을 승오에게 보내시고 길옆에 서서 계셨으나 추격자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가니라. 이에 환하게 보이는 산길로 환행하시는데 마침 산기슭에 한 재실이 있으므로 임어 하시니 주인이 환대하며 의복과 수침을 수발하니라. 그 날밤을 유어 하신 후에 통사동으로 환어하시다가 태인 근처에서 도장 일행을 만나 함께 무사히 환어하셔서 "이 일은 실로 구천 상제님의 덕화요, 도인들의 정성이니라." 하시며 일행의 노고를 치하하시니라.
74
선덕 부인께서 둔궤를 보고 감격하셔서 한참 동안 흐느끼시다가 "10년간의 삼천(三遷) 끝에 진주에게 돌아왔으니 천행(天幸)이로다." 하시고 다음과 같이 둔궤의 내력을 설명하시니라. "이 둔궤는 증산 상제님께서 화천 전년 4월에 동곡약방을 차리실 때, 약장과 함께 만드셔서 '이 궤 속에 번개가 들어야 한다.' 하시고 또 '이는 나의 도지와 도통(道統)을 숨겼으므로 둔궤니라.'하시며 약방에 비치하시고 공사를 보신 천보니라. 화천하신 후에 김수부(金首婦)가 간수하더니 고수부(高首婦)가 교단을 차릴 때 옮겨 갔는데 차경석의 전횡(專橫)을 못 이겨 떠나자 경석이 숨겼던 것이니라. 그 문에는 증산 상제님께서 손수 자물쇠를 채우시고 열쇠를 숨기셨으므로 지금까지 누구도 열 수 없으니라.
75
둔궤의 크기는 가로 4척, 높이 3척, 폭 1척 5촌이며 5푼 두께의 오동나무 판자로 짜고 그 겉에는 옻칠을하여 모양은 함과 같으나 문은 장롱과 같이 앞으로 열게 되어 있으니라. 선덕 부인께서 그 문에 채워진 자물쇠가 한 번도 열린 흔적이 없음을 확인하시고 기뻐하시니라.
76
이러한 설명을 들은 가족과 도인들은 그 신비에 새삼 감탄하면서도 약장까지 모셔오지 못함을 서운히 생각하고, 더욱이 장사들은 상제님의 후한 대접을 받았으면서도 이 일을 아울러 완수하지 못한 자책으로 고두사죄(叩頭謝罪) 하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둔궤만으로도 족히 구천 상제님의 도수를 받들 수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 만일 꼭 필요하다면 왜 그대로 두라 하였으랴?" 그대들은 앞으로 한 번 더 할 일이 있으니 그때에도 차질 없도록 하라." 하시니라.
77
상제님께서 공부실 상좌(上座)에 둔궤를 안치하시고 그날 저녁에 대 치성을 올리신 다음, 하교하시기를 "내가 그대들의 도움으로 천장지보(天藏之寶)를 잘 모시게 되었는바 이는 구천 상제님께서 짜 놓으신 삼천(三天)의 도수로서 내가 봉행하여야 할 큰 도수 중의 하나니라.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워도 하여야 할 공사며 또 나 아니면 못 할 일이니라. 만약 도수가 아니라면 모셔 올 필요도 없지마는 다른 때 그들이 잠든 틈에 쉽게 모셔와도 될 일을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 잠자는 사람들을 굳이 깨워 알리기까지 할 이유가 어디 있으리오? 그러므로 후일 오늘의 일에 대하여 시비를 일으키는 자는 도수와 공사를 모르는 자니라." 하시고 이날부터 둔궤도수(遁櫃度數) 공부에 임하시니라.
78
둔궤도수 공부 한 달이 되던 날 상우와 두 장사에게 하명하시기를 "그대들은 오늘 둔궤를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용화산(龍華山)의 반구정(伴鷗亭)으로 옮기되 소로를 통하여 가도록 하라." 하시며 그 가는 길과 반구정의 내력을 하교하시니라. 일행은 이날 둔궤를 혼수(婚需) 짐처럼 꾸며지고 통사동을 출발하여 임실(任實) 장수(長水)를 거쳐 산청(山淸) 의령(宜寧)을 지나 반구정까지 좁은 길로 돌아 5일 만에 도착하니 상제님께서는 조주일 권태로 등을 거느리시고 먼저 임어하셨으니라.
79
반구정은 상제님의 13대조 휘 방(垹), 호 두암공(斗巖公)이 임진왜란에 곽재우(郭再祐) 장군 등과 창녕(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의거하여 전공을 세우시고, 정란 후 만년에 낙동강(洛東江)과 정암강(鼎岩江 : 남강의 하류)이 합류하는 도흥진(道興津) 옆 층암절벽 위에 지은 정사(精舍)로서 공이 시문(詩文)과 서도(書道)를 즐기며, 때로는 곽재우 장현광(張顯光) 등 옛친구들과 함께 경을 강론(講論)하고 시를 읊으시던 곳이며, 공의 묘사재실(墓祀齋室)이기도 하니라. 뒤쪽과 좌우에는 용화산(龍華山)의 산악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수목이 울창하며, 앞에는 절벽 아래 낙동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는 남지(南旨)에서 수산(守山)으로 이어지는 강변 평야와 이를 에워싼 종남산(終南山) 화악산(華岳山) 화왕산(火旺山)의 전망이 절경을 이룬 곳이며, 근처에 사람이 살지 않아 인적이 끊어진 깊숙하고 고요한 곳이니라.
80
상제님께서 반구정 공부실 상좌에 둔궤를 모시고 공부 설석하신 다음 대 치성을 올리시니라. 두 장사에게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시며 위로금을 하사하시니 그들은 "진인의 공사에 만분지일이라도 도와드림이 일생의 영광 이옵고 보수를 바람은 아니옵나이다." 하고 사양하며 그중에서 여비만 받아 떠나니라. 상제님께서 "그대들의 공로는 후세에 길이 남으리라." 하시며 못내 아쉬워하시니라.
81
이날부터 백일 간을 낮에는 반구정 공부실에서 수도하시고, 밤에는 절벽 아래에 있는 강변 백사장에서 "검무공부(劒舞工夫)"를 하시는데, 그때마다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일어나니라. 상제님께서는 이 기간 눈보라가 몰아치는 엄동설한의 강변에서 하루도 쉬지 않으시며 혹심한 고초를 겪으시니라.
82
상제님께서 2월 중순 백일공부를 마치시던 날 "이제 '둔궤도수'를 잘 마쳤노라." 하시며 시종들의 노고를 치하하신 다음, 상우에게 하명하시기를 "이 둔궤 문에 채워진 자물쇠를 열어야 하리니 열쇠를 만들도록 하라." 하시니라. 상우가 칠원읍(漆原邑)에 가서 열쇠 장수를 데려와 자물쇠에 맞추어 열쇠를 만들게 하여 열려고 하였으나 열리지 않으니라. 다시 여러 개를 만들어 며칠간 수십 차례 시험하였으나 끝내 열리지 않음으로 "그만두고 돌려보내라." 하시니라.
83
이튿날은 도기 12년 세차 경신(庚申 : 서기 1920년) 2월 17일, 양력 4월 5일 청명절(淸明節)이니라. 상제님께서 입절시각(入節時刻)인 사(巳)시에 공부실에서 절후 치성을 올리신 후, 둔궤 앞에 따로 법수(法水)를 상에 차려 올리시고 시종들을 정렬하여 법좌(法坐)하게 하신 다음, 친히 분향 사배하시고 일동에게 태을주를 연송하게 하시니라. 상제님께서 공부하실 때 쓰시는 주(籌)대를 열쇠 구멍에 끼우시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어나며 천지가 진동하고 실내가 별안간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며 자물쇠가 스스로 열리니라. 일동이 신이하게 생각할 때 상제님께서 둔궤의 문을 여시니 또 한 번 뇌전이 일고 궤 안에서 섬광이 번쩍이니라.
84
상제님께서 둔궤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사배를 올리시므로 일동도 따라 올리고 내부를 살피니 그 안에는 양피(羊皮) 한 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들어 있으니라. 내부 정면 중앙에는 "오강록(烏江錄)", 그 좌측에 "설문(舌門)", 우측에 "반구제수(半口齊水)", 좌면에는 "천문지리 풍운조화(天文地理 風雲造化)", 우면에는 "팔문둔갑 지혜용력(八門遁甲 智慧勇力)"이라는 화각서(火刻書)가 있고 정면 문자 주위에는 주사(朱砂)로 24점이 선명하게 찍혀 있으니라.
85
상제님께서 둔궤 내부를 상세히 친감하신 다음, 말씀하시기를 "과시 천보로다. 수운(水雲)의 거년 경신(庚申) 4월 초 5일은 음력이로되, 나의 금년 경신 4월 초 5일은 양력이니 음양합덕(陰陽合德)이며 태극도수(太極度數)가 분명하도다." 하시며 감탄하시니라. 다시 문을 닫으신 다음, 자물쇠를 채우셔서 전과 같이 안치하시며 "이제 너희들이 본 바와 같이 내가 구천 상제님의 도수를 음양합덕으로 하나하나 잘 풀어 가고 있으니 흔쾌한 바니라. 다만, 너희들은 조심하여 천기를 누설하지 말지니라." 하시니라.
86
이해 3월 초순에 통사동으로 환어하셔서 다시 공부하시다가 상우에게 하명하시기를 "내가 금년에 마쳐야 할 큰 도수가 남아 있으니 이번에는 검무도수(劒舞度數)니라. 장단검(長短劒) 세 자루가 필요하되, 장검은 칼날이 5척, 중검은 3척, 단검은 척 반이면 되느니라. 그러나 장검은 옛날 이충무공(李忠武公)이 사용하던 칼을 빌려 써도 될 것이니, 그 일은 도장께 말씀드려 충무공의 종손 이종옥(李種玉)에게 청탁하도록 여쭈되, 만약 여의치 못하면 그 도본(圖本)을 떠다 석 자루를 모두 새로 만들어야 되느니라." 하시니라. 상우가 도장께 여쭈니 몸소 아산(牙山)에 가셔서 만주서 독립운동 당시 교분이 두터우신 종옥을 만나 사유를 말씀하셨으나, 왜경의 감시가 심하여 빌려 오실 수 없음으로 그 도본을 떠 오셔서 만들기로 하시니 상제님께서 그 방법을 상우에게 상세히 하명하시니라.
87
상우가 명을 받들고 안면도에 가서 도공(刀工) 성기춘(成奇春)에게 도본을 주어 세 자루를 만들도록 하니라. 기춘은 상우가 시키는 대로 인부 3인을 데리고 철재와 도구를 준비하여 밀양 운문산(雲門山) 천황봉(天皇峰) 아래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 비밀리에 야장간(冶匠間)을 차리고 칼을 치기 시작하니라. 상제님께서는 미리 신산공(晨山公)에게 총감독을 맡기시고 상우에게는 한양에 가서 만국지도 5장을 사다가 쇠를 달굴 때마다 하루에 한 장씩 풀무 불 속에 소화하게 하시더니 50일 만인 5월 단오절에 칼 세 자루가 완성되니라. 이를 반구정으로 옮겨 미리 임어하신 상제님께 올리니 기춘과 인부들에게 노고를 치하하시고 위로금을 하사하시니라.
88
상제님께서 반구정에서 대 치성을 올리신 다음, 그날부터 지난겨울과 같이 낮에는 공부실에서 수도하시고 밤에는 검무도수를 보시니라. 강변의 백사장에 단(壇)을 모으게 하시고 사방에 등불을 밝히신 다음, 칼 세 자루를 휴대하시고 단상에 임하셔서 검무(劍舞)를 하시니 전보다 더한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음으로 시종들은 도수를 보시는 내용을 알 수 없고 다만, 안개 속에서 칼 부딪치는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이니라.
89
백일 간의 검무도수를 마치시고 8월 중순에 다시 통사동으로 환어하실 때, 칼은 가져오시고 둔궤는 그곳에 두시니라. 그 후에 조주일이 상제님을 배신하고 몰래 반구정에 가서 둔궤를 가지고 진주(晉州) 모처로 도망하여 사술(詐術)로 신도를 모으다가 일 년 만에 죽으니라. 상우가 이 소식을 듣고 상제님께 둔궤를 찾고자 여쭈니 "둔궤는 이미 도수에 따라 쓰여 나의 일을 다 마쳤으니 그로써 족하고 둔궤라는 둔(遁) 자는 또한 도망 둔 자로서 도망자의 소유가 됨은 필연이며, 이제는 한낱 궤에 불과하니라. 또 비일주일(非一周一)이라 후일에도 이러한 배신 난법자가 나타나 세상을 현혹하는 일이 있으리라." 하시며 찾지 말도록 하시니라.
90
이해 추석에 상제님께서 통사동 공부처에서 명절 치성을 올리시고 상우에게 하명하시기를 "이번 도수에는 벽조목(霹棗木)이 있어야 하니 너는 도장께 가서 구하여 주시도록 여쭈라." 하시니라. 상우가 명하신 대로 하나 도장께서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 꿈에 밀양 어느 곳에 산다는 노인이 나타나서 '제집에 10여 년 된 벽조목이 있사오니 쓰실 일이 있사오면 올리겠나이다.' 하므로 이상히 여기던 차니라." 하시고 당일 출발하셔서 수소문하신 끝에 밀양 김동식(金桐植)으로부터 구하여 오시니라. 이는 그의 부친이 생존 시에 구하여 두고 유언하시기를 "이것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쓸 것이 아니라, 신인이라야 사용하리니 발설하지 말고 비장하였다가 훗날 현몽을 듣고 오시는 분에게 전하라." 하여 지금까지 10여 년간 보관 중이라 하며 값도 받지 않고 드린 것이니라.
91
상제님께서 조각공을 불러 비밀리에 벽조목을 네모 형태로 깎고, 면마다 다른 모양의 문자를 음각과 양각으로 새기게 하셔서 청홍색 비단 주머니 속에 간수하시니라. 공부하실 때는 도장에 주사를 묻혀 백지에 찍어서 소화하시거나 다른 용도에 쓰시고 출어하실 때는 그 도장 주머니를 허리에 차시며 "이는 벽조목 도수니라" 하시니라.
92
이해 9월 말경 상우에게 하명하시기를 "이번에는 '단도수(壇度數)'니라. 이 도수는 인적이 없고 계견성(鷄犬聲)이 들리지 않는 바닷가라야 하니 너의 고향에 가서 적합한 곳을 찾으라." 하시니라. 상우가 안면도에 가서 탐사한 결과 창기리(倉基里) 동쪽 5리쯤 되는 곳에 있는 철도(鐵島 : 쇠섬)가 최적지이므로 돌아와 복명(復命)하니 상우 상식 등을 거느리고 행행하셔서 군산(群山) 광천(廣川)을 거쳐 5일 만에 안면도에 임어하시니라.
93
11월 초3일 창기리 도인 김창규(金昌奎)의 집에 행재하시며 철도에는 하나뿐인 박영호(朴英鎬)의 집에 공부처를 정하시고 앞 밭에 종횡 6칸의 정사각형으로 높이 3척의 평탄한 토단(土壇)을 쌓게 하시니라. 단 위에 24방위를 설정하여 방위마다 13척의 긴 대나무를 3개씩, 도합 72개를 세우고 중앙에는 사방이 3칸, 높이 3척의 토단을 또 쌓게 하시니라. 그 중심에 높이 21척의 긴 대나무를 세우고 72개 긴 대나무의 꼭대기와 노끈으로 연결시킨 다음, 그 위에 기를 달게 하시니라. 기는 길이 1척 5촌, 너비 1척의 흰 베에 주사로 중앙기에는 태극 그 외에는 용호(龍虎) 등의 물형을 그리시고 8괘 · 12지 · 28수 등의 문자를 쓰심이니라.
94
단의 설치가 완료되자 공부실에서 대 치성을 올리시고 그날부터 단도수를 보시니라. 낮에는 공부실에서 수도하시고 밤에는 단 위에서 반구정에서와같이 검무도수를 보시는데, 단상에 임어하실 때는 상식에게 대나무마다 기를 달게 하시고 공부 후에는 거두게 하시니라. 공부하실 때는 타인의 접근을 엄금하셔서 시종하던 상우 상식과 그곳 도인 이수영(李壽寧) 김창규(金昌奎) 등은 방문을 닫고 있었으므로 상제님께서 공부하시는 내용을 알 수 없었고 다만, 우레 같으신 용성(龍聲)과 칼 부딪치는 소리만 간간이 들리니라.
95
이때는 소한과 대한 무렵이므로 눈이 많이 내렸으나 단 위에는 한 점도 쌓이지 않았으며 다른 땅은 모두 얼었어도 단의 흙은 얼지 않을 뿐 아니라, 온화한 김이 피어오르되 질지 않으니라. 때로는 상제님의 후광(後光)이 더욱 세게 발함을 보고 시종들은 모두 신이하게 여겼으나 이 또한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못하게 하시니라.
96
상우가 지난봄에 둔궤의 내부를 살피고 그 신비에 감동한 이래, 그 비의(祕意)를 깨닫기에 골몰하다 못하여 연말 어느 날 상제님께 오강록과 설문의 뜻을 신중히 여쭈니 "오강록(烏江錄)은 나의 비결이고 설문(舌門)은 너희 비결이니 더는 묻지 말라." 하시니라. 다시 여쭈기를 "양피는 미생(未生)의 뜻이옵고, 24점은 사철의 뜻이오며 반구제수(半口齊水)는 선생님의 존함(尊啣)이 분명하오나 반개국(半開菊)의 뜻은 무엇이옵나이까? 하교하여 주옵소서." 하니 "국화는 9월 5일에 반쯤 핀다는 뜻이니라. 그러나 이런 일에 몰두하면 수행에 방해되니 근신하고 수구여병(守口如甁)하라." 하시니라.